2024년 4월 20일(토)

호텔리어부터 AI매니저까지… “발달장애인 직업, 산업 트렌드 따라 확장”

신드롬을 일으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지난 18일 종영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억지스럽지 않게 풀어낸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스토리는 자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비틀었다는 호평을 받는다. 로스쿨을 수석 졸업한 자폐인 변호사를 현실에서 찾아보긴 어렵지만, 비장애인과 함께 다양한 산업군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데이터를 관리하는 ‘데이터매니저’, 테마파크·놀이공원에서 근무하는 ‘캐스트’, 호텔 객실·식음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리어’까지. 발달장애인 일자리는 공공·민간기관 지원을 바탕으로 산업 트렌드에 따라 넓혀가고 있다.

발달장애 직무 개발 위해 유망 산업 분석

1990년대만 해도 발달장애인은 우편 수발, 제품 포장 등 단순 업무만 맡았다. 마땅한 정규직 일자리도 없었다. 이에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하 공단)은 장애인의 고용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1994년부터 ‘직업영역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다. 직업영역개발은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직무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현재까지 공단이 개발한 직무만 50개에 이른다.

자폐성 장애인 김씨는 데이터메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데이터매니저는 자율주행 자동차 인공지능(AI) 엔진 학습에 필요한 다양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관리하는 직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공
자폐성 장애인 김씨는 데이터메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데이터매니저는 자율주행 자동차 인공지능(AI) 엔진 학습에 필요한 다양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관리하는 직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공

발달장애인 직무 개발은 유망 산업군 중심으로 이뤄진다. 현재 성장하는 산업군이나 앞으로 성장할 산업군 직무를 개발해 고용률을 지속적으로 늘리기 위해서다. 유은경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직업영역개발부장은 “하나의 직무를 개발할 때마다 발달장애인 특성과 산업 트렌드의 접점을 찾는데 집중한다”면서 “직업을 정하고 나면 해당 직업이 수행하는 다양한 업무 중 발달장애인이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업무들로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AI 엔진 학습에 필요한 다양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관리하는 ‘데이터매니저’ 직무가 새롭게 개발됐다. 데이터매니저는 ▲데이터 레이블링(차·사람 등 자료에 이름 달기) ▲오류 데이터 검증 ▲자료 저장과 공유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세계적인 ‘탄소중립’ 흐름에 신재생에너지 산업이 성장하면서 한국남동발전과 공단은 태양광 집열판 유지·관리, 발전량 모니터링 등을 수행하는 ‘신재생에너지 지킴이’ 직무를 만들기도 했다.

유은경 부장은 “자폐성 장애인은 정확하고 꼼꼼하다는 강점이, 지적 장애인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임한다는 강점이 있다”면서 “정해진 기준·원칙에 따라 섬세하게 일해야 하는 직무를 찾아내고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공단은 발달장애인의 직업을 호텔리어, 웹툰 작가, 편의점 스태프 등으로 확장했다. 편의점 스태프는 편의점에서 캐셔 업무를 제외한 상품 진열·운반·검수, 매장 청결유지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이다. 2016년 직무 개발 당시, 인천공항과 서울 내 CU 직영 편의점 9곳이 발달장애인 30명을 고용했다.

발달장애인 직무 확장과 더불어 고용률도 꾸준히 늘었다. 공단에 따르면, 국내 발달장애인 고용률은 2017년 22.9%에서 2018년 24.9%, 2019년 27%, 2020년 23.2%, 2021년 28%로 꾸준히 늘었다. 2020년의 경우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고용률이 일시 하락했다는 게 공단 측의 설명이다.

유 부장은 “공단은 장애인 고용이 갖는 의미,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일할 수 있는 방법 등을 담은 제안서를 기업에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면서 “발달장애인의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산업 트렌드를 분석하고 기업 맞춤형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낯선 업무에도 금방 적응… 근무가 즐거워요”

민간 차원에서는 사회적기업 베어베터가 발달장애인 직무 개발의 선두에 있다.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은 베어베터는 2012년부터 발달장애인 맞춤형 직무를 개발해왔다. 처음에는 복사, 제본 등 인쇄업으로 시작했다. 이후 로스팅 원두를 소분·포장하고, 커피머신을 관리하는 바리스타 직무를 개발했다. 2014년에는 화환·난 등 화분을 관리하고 꽃배달을 하는 화훼 사업도 개시했다.

최근에는 네이버, 카카오, 대웅제약, NHN 등 파트너사 사옥 내 편의점에서 발달장애인이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손성경 베어베터 매점사업팀장은 “지난 2018년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는 발달장애인 직무로 편의점 스태프가 적합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편의점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은 하루에 4시간씩 근무하며 상품 검수, 유통기한 확인, 매장 청결유지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편의점에서 근무 중인 발달장애 사원은 총 54명이다. 손 팀장은 “기업들은 발달장애인을 직접 채용하거나 베어베터 소속의 발달장애인을 투입해 편의점을 위탁운영한다”면서 “기업이 직접 채용을 하는 경우 베어베터는 면접, 훈련, 적응 과정에서 자문을 준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베어베터에 입사한 지적장애인 이태범(23)씨는 현재 매점팀에 소속돼 편의점에서 근무 중이다. 이씨는 “처음에는 익숙한 업무가 아니어서 낯설고 어려웠지만,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자신감이 늘었다”며 “지금은 일하는 게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해외의 경우 스포츠 해설가, 양봉가, 동화책 삽화가 등 발달장애인 개인의 흥미와 재능을 살린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들이 생성되고 있다. 일례로 더스틴 플런켓(38)은 미국 스포츠 전문 방송사인 ESPN에서 동료 진행자와 함께 스페셜 올림픽(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이 참가하는 국제경기대회) 경기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경기 내용을 시청자들이 알기 쉽게 해설하거나, 경기 결과의 승리와 실패 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할리우드 에이전시에서 프로덕션 보조로 일하며 예고편을 구입하고, 세트 현장에 캐스팅된 배우를 기록하는 등의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발달장애인도 있다.

유은경 부장은 “발달장애인은 모든 직업군에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개인의 특성과 역량을 살린 직무를 개발해 더 많은 발달장애인이 원하는 직장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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