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폭우로 상처 입은 구례… ‘주민의 힘’으로 일어서다

구례 수해 현장 ‘공동체 중심 재난 대응’

지난달 10일 구례 수해 피해 지역의 복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김순호(왼쪽에서 셋째) 구례군수와 아이쿱생협 재난대응위원회, 에이팟코리아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 아이쿱생협 제공

“우리 도서관을 자원봉사 쉼터로 쓰면 어떨까요?”

“어르신들이 선풍기도 없이 바닥에 비닐 깔고 지내신다는데 도울 방법을 찾읍시다.”

심각한 수해를 입은 전남 구례가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인구 2만5000여 명이 사는 구례가 폭우로 물에 잠기자 주민들은 공공보다 빠른 속도로 대응을 시작했다. 각자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후원금이나 물품을 모아 나누고, 마을도서관은 자신들의 공간을 자원봉사자용 쉼터로 내놨다. 생활협동조합은 더 조직적으로 피해 상황 파악을 진행했다. 다양한 주민 조직들이 초반 재난 대응 시기부터 지금까지 서로 안부를 묻고 일손을 보태며 지역을 일구고 있다.

주민이 주축이 된 대응팀, 공공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지난달 7일부터 이틀간 쏟아진 500㎜ 물 폭탄에 구례가 직격탄을 맞았다. 구례군에 따르면 수해 피해액만 1200억원으로 추정된다. 피해 직후 2주가량 매일 2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큰 도움을 줬지만, 겪어본 적 없는 큰 물난리에 자원봉사자 관리까지 겹치면서 군청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아이쿱생협이 먼저 나섰다. 지난 2017년 포항·경주 지진을 겪으며 생협 조합원 중심으로 ‘재난대응위원회’를 꾸렸던 아이쿱은 당시 획득한 노하우를 발휘했다. 구례섬지아이쿱생협 관계자들은 현장 복구를 위해 해야 하는 일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대피소에 거주하는 이재민들의 목욕과 식사 지원, 필요 물품 등을 구례군청에 전달하기도 했다. 아이쿱과 협력하는 비영리단체 에이팟코리아도 주민들이 요구하는 물품들을 정리해 자원봉사센터나 다른 비영리단체와 공유했다.

구례에 기반을 둔 주민 조직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구례군 사람들의 문화 거점인 산보고책보고(산책) 마을도서관은 즉시 자신들의 공간을 밀려드는 자원봉사자를 위한 쉼터로 제공했다. 샤워와 식사를 제공하고 인터넷으로 후원금도 모집했다. 친환경 놀이를 연구하는 구례영유아놀이모임 엄마들은 시원한 물을 사 들고 지역 어르신들을 집집이 방문했다. 침수된 집 안에서 비닐만 깔고 생활하는 어르신, 가전제품이 쓸려나가 선풍기 하나 없는 방에서 폭염을 견디는 어르신들을 들여다보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파악했다.

구례에서 ‘공동체 중심 재난대응 시스템’이 작동한 이유는 이 지역에 협동조합, 시민단체 등 공동체 운동이 일찌감치 뿌리내린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구례 주민 대다수가 생활협동조합 조합원이고, 아이쿱생협 구례자연드림파크에서 일하는 직원 600여 명 중 80%가 구례 주민이다. 구례를 비롯한 지리산 지역은 지난 2000년대부터 ‘생태·대안 공동체 운동의 요람’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인근 지역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지리산이음의 임현택 사무국장은 “구례나 남원 등은 지역 공동체와 함께 상생하며 살아가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며 “공동체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구례 수해 복구 작업에 투입된 자원봉사자들이 지붕이 뜯기고 농기구들이 뒤엉킨 축사를 정리하고 있다(왼쪽 사진). 구례자연드림파크에서는 구례 이재민을 위해 목욕 시설과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 순천대학로협의체·아이쿱생협 제공

공동체 중심 재난 대응, 해외에선 대세

지난달 9일 군민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대책본부도 구체적인 피해 상황 조사를 시작했다. 대책본부는 영상팀 등을 꾸려 피해 가정을 방문하며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집 안 영상을 촬영하면서 피해 보상액이나 공공의 기록에 담기지 못하는 피해를 기록하고 있다. 대책본부 관계자는 “정부 보상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 주민들의 피해 현실을 담고 있다”며 “금전적 피해뿐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해온 사진이나 기념품, 옷가지 등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을 모두 잃어버린 주민들의 상황을 기록해 장기적인 마을 복구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대책본부는 현실과 동떨어진 ‘재난지원금’ 지급 규정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규정상 집이 모두 무너진 ‘전파’는 최대 1600만원, ‘반파’는 800만원, ‘침수’는 200만원이 지원되는데, 이번 수해 특성상 전파가 37동인 데 반해 침수는 669동으로 침수 가구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주민들은 “사실상 집을 전부 새로 고치고 모든 가전제품과 기기를 새로 사야 하는 형편인데 200만원으론 턱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동차·농기계·가축 먹이·식당 기자재 등은 아예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대책본부는 주민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손해사정사와 함께 피해 상황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UN 등 국제사회에서는 ‘공동체 중심 재난대응’에 주목한 지 오래다. 유엔지역개발센터는 지난 2002년부터 3년간 ‘공동체 중심 재난대응을 통한 지역 지속가능성 확대’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유엔재난위험경감사무국(UNDRR)이나 유엔환경계획(UNEP) 공동체 중심 재난 대응을 중요 어젠다로 발표했다.

국내 전문가들도 재난 대응에 지역 주민과 공동체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기근 원광대 소방행정학과 교수(국가위기관리학회장)는 “미국·일본 등 국가에서는 공동체 중심 재난 대응을 원칙으로 삼은 지 오래됐다”면서 “갑자기 덮친 재난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지역 풀뿌리 네트워크를 키워야 긴급 대응은 물론 장기적인 재건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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