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인도주의’ 일깨운 계기로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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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재난은 새로운 세상을 연다. 박경서(81) 대한적십자사 회장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배우고 또 배웠다”고 말했다. “이번에 확진 환자를 200명 가까이 받은 영주적십자병원 간호사들이 영상을 보내왔어요. 레벨D 방호복 탓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땀에 머리가 눌어붙었어요. 그런데도 ‘힘내자’면서 웃더군요. 우리 코로나 전사(戰士)에게 인도주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14일 만난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발현된 인도주의 정신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잡이가 됐다”고 말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4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만난 박 회장은 “코로나 사태는 ‘나 혼자 잘 사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걸 상징하는 사건”이라며 “역설적으로 이웃을 껴안고 보듬는 정신이 우리 사회에 살아 움직이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국내 1세대 인권전문가로 꼽힌다.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를 지냈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통일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경찰개혁위원회 초대위원장, 유엔 인권정책센터 이사장, 유엔 세계인권도시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인도주의(人道主義)

―코로나 사태가 막 터졌을 땐 어땠습니까?

“재난이 터지면 누가 제일 빠르게 반응할까요? 정부? 시민사회? 아닙니다. 기업입니다. 중국 우한에서 신종 감염병이 번지니까 그곳에서 사업하는 국내 기업들이 제일 먼저 연락 왔어요. 이재민 긴급 지원해달라면서요. 적십자는 인도주의 정신으로 국제공조활동이 가능한 조직입니다. 곧장 중국적십자사 우한 지사에 전세기로 방역 물품을 보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확진자가 거의 없을 때였거든요.”

―그러다 국내에서도 비상이 걸렸지요?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오고 사흘 뒤인 1월 23일 긴급구호팀을 꾸렸습니다. 저도 아시아 6국과 위기·재난 대응 노하우를 공유하는 해외 일정 중에 급히 귀국했고요. WHO에서 코로나19 비상사태 선포한 1월 31일을 기점으로 응급구호품을 긴급 지원하는 대응 활동을 전면 실시했습니다. 2월 들어 대구·경북에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적십자병원 의료진을 현장에 급파했고, 봉사원과 RCY 단원들은 방역 활동과 취약계층 지원에 투입됐습니다.”

―산불, 수해, 지진에 감염병까지 재난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재난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재난이 아니라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는 지구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십자의 역할도 무겁지요. 적십자는 크게 병원·혈액사업과 구호·봉사사업으로 나뉩니다. 병원이나 혈액 사업은 정부의 동반자 역할을 수행하는 겁니다. 현재 적십자병원은 전국에 7개 있습니다. 이 가운데 상주·영주·서울 적십자병원이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근 400명의 환자를 완치시켰어요. 감염병 재난은 병원·혈액은 물론 구호·봉사도 모두 투입돼야 하는 겁니다.”

―국내에 적십자병원이 7곳밖에 없나요?

“우리나라에도 한때 적십자병원이 22곳 있었습니다.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서 이제 7곳 남았습니다. 얼마 전 옛 대구적십자병원 건물이 헐렸는데, 어느 의사분이 아쉬움을 토로하더군요.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면서요. 독일은 적십자병원을 400개나 갖고 있습니다. 일본도 99개 있어요. 이번에 200명의 환자를 받아낸 영주병원은 1년에 30억원 적자를 감수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채산성으로만 따질 문제는 아닌 겁니다.”

―한때 혈액 부족 현상도 겪었습니다만.

“감염병 확산으로 헌혈 인구가 뚝 떨어지면서 혈액 보유량이 2.8일분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적정 혈액 보유량이 5일분인데, 상황이 심각한 거죠. 이렇게 되면 의료 기관에서는 위급하지 않은 수술들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헌혈 동참 대국민 호소문도 발표하고, KBS 아침마당에 나가서 헌혈을 독려하기도 했어요.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혈액만은 못 만들잖아요. 시민의 참여와 연대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호소문 발표 이후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혈액 보유량이 상당 부분 회복됐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현재 혈액 보유량은 4.4일분에 불과하고, 여전히 헌혈 참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미러클(miracle)

―코로나 재난 모금액은 역대 최고로 알고 있습니다.

“2~3월에 집중적으로 국민 성금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400억원이 금방 넘어버려요. 그런데 4~5월에 그만큼 들어왔어요. 지금은 815억원입니다. 놀라운 연대입니다. 그야말로 미러클(miracle)이죠. 최근에 공익법인 투명성과 책무성이 부각되고 있잖아요? 적십자사는 이미 2017년에 국내 비영리단체 최초로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했습니다. 인도주의 사업을 하는 곳에서 투명성은 생명입니다. 돈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꼭 챙겨야 하는 겁니다.”

―구호품을 적재적소에 전달하는 게 쉽지만은 않지요?

“전국에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30만 봉사원과 RCY 단원들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적십자는 이런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 없인 안 됩니다. 아무것도 주질 않는데, 본인들이 도시락을 싸와 가면서 봉사해요. 딱 하루만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업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2~3개월씩 현장에 머물면서 손발이 돼주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봉사원들은 재난 대응 노하우가 있지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어려움은 없나요?

“물론 있지요. 지난해 기준으로 병원·혈액 사업을 제외한 인도주의 사업을 위한 정부 지원액은 약 58억원입니다. 전체 사업비 1450억원의 4% 수준이지요. 호주적십자는 47%, 일본 54%, 프랑스 86% 등 OECD 주요국과 비교하면 아주 미미한 실정입니다. 적십자회비 모금은 정부에서 적십자 인도주의 활동을 장려하고 확대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방법입니다. 2000년부터 지로 방식으로 모금했는데, 3년 내에 이를 폐지하고 다른 방식으로 개선하려고 합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나요?

“시대 변화에 따른 국민들의 지로 모금 제도에 대한 개선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민이 있지요. 인도주의 사업을 유지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니까요. 지로 모금을 폐지하면 정부의 보조자로서 재난이나 복지 사각지대를 지원하는 공적인 역할이 축소될 수 있습니다. OECD 수준의 정부 지원과 시대 변화에 맞게 모바일 고지 등 모금 방식의 다변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현재 ‘복권 및 복권기금법’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개정을 추진 중입니다. 특히 적십자 인도주의 활동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법 전부 개정이 필요합니다. 적십자사의 설립 근거에 제네바협약과 국제적십자회의의 근거 조항을 추가해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적십자 활동의 중립성과 독립성 보장을 명시해야 합니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온 세계가 코로나19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잠시 잊힌 이야기를 꺼내고 싶습니다. 남북 이산가족입니다. 현재 남북 이산가족 신청자 13만3387명 중 5만1079명만이 생존해 계신 상황입니다. 적십자는 지난해 서울 5곳을 비롯한 전국 13곳의 화상상봉장을 보수했고 정부와 협력해 이산가족 영상편지, 유전자 검사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도적 현안에 대해서도 국제적십자사연맹과 긴밀히 협력 중입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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