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 비영리단체 ‘캠프’ 대표 이철용 목사 인터뷰
필리핀 불라칸주 산호세델몬테에서는 매년 가을 ‘땅라완(Tanglawan) 축제’가 열린다. 땅라완은 이 나라 말로 ‘빛’이라는 뜻이다. 색색의 손전등을 든 수천 군중의 행진이 축제의 백미. 어둠이 내린 바다를 밝히는 등대가 도시의 상징이라고 하니, 태생이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산호세델몬테에는 태풍 같은 자연재해나 철도 건설 등 국가 개발 사업으로 터전을 잃은 도시 빈민 7만여 명이 모여 사는 ‘타워빌’이 있다. 이곳에 ‘땅라우(Tanglaw)’로 불리는 한국인이 산다. 땅라우도 빛을 의미한다. 주인공은 이철용(56) 목사. 올해로 10년째 타워빌에서 구호 활동을 하고 있다. 주민들이 일하고, 배우고, 치료받고, 서로 연대하는 토대를 쌓는 것이 그가 대표로 있는 국제개발 비영리단체 ‘캠프’의 역할이다.
캠프는 타워빌이 본진이다. 다른 단체들이 한국에 본부를 두고, 활동가를 파견해 사업하는 것과 반대다. 슬로건도 ‘지역에서, 지역을 위해, 지역과 함께’다. “로컬의 문제는 로컬에서 푼다”는 이 대표의 철학이 담겼다. 그는 국제개발협력의 핵심 키워드로 ‘주민 역량 강화’와 ‘선택과 집중’의 두 가지를 꼽는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캠프 한국사무소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올해가 타워빌에서 사업한 지 꼭 10년째다.
“변화를 주민들 얼굴에서 본다. 필리핀 사람들은 낙천적이다. 악취가 진동하는 마닐라 빈민촌에도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타워빌은 달랐다. 다들 무표정했다. 일자리가 없어서다. ‘하루에 50페소(약 1200원)를 못 번다’더라. 캠프는 일터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주민들은 미소를 되찾았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돈 번다는 것에 다들 자부심을 느낀다.
―캠프의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보면 사회적 경제가 가운데 있다.
“사회적 경제가 뿌리 내려야 지역과 주민 모두 잘살 수 있다. 의류 봉제 사회적기업 ‘익팅’을 시작으로 보건의료협동조합 ‘클리닉코뮤니타드’, 유기농업협동조합 ‘올가’, 소상인협동조합 ‘띵딕’, 문구 생산 협동조합 ‘치키팅’ 등 다양한 조직을 꾸렸다. 이들이 타워빌 전체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타워빌에 처음 들어간 게 2010년 1월인데, 익팅이 문 연 것은 이듬해 7월이다.
“지역에 대한 이해 없이 무턱대고 사업하기 싫었다. 잘 모르니까 공부부터 했다. 타워빌 전체 가구의 10%를 대상으로 욕구 조사를 진행했고, 한국에서 전문가들을 모셔와 주민들과 함께 개발 방향도 논의했다. 첫 사업으로 의류 봉제를 선택한 것도 전적으로 주민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왜 봉제 공장이었나.
“타워빌은 ‘나나이(Nanay·어머니)’들의 마을이기 때문이다. 이곳 남자들은 왕복 7시간 걸리는 마닐라로 막노동하러 나갔다. 교통비가 비싸서 가면 몇 달씩 머문다. 마을에 남은 나나이들은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를 원했다. 필리핀은 유치원생부터 직장인까지 모두 교복이나 유니폼을 입는다. 봉제 기술을 배우겠다는 나나이가 많았다. 지역·시장 조사, 나나이 상담·교육, 지역 정부와의 거버넌스 구축 등 ‘밑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1년 넘게 걸렸다.”
―봉제로 시작해 보건, 교육, 농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혔다.
“전부 지역민의 요구로 시작했고, 지역민의 참여로 운영된다. 캠프는 한국에서 프로그램을 짜 와서 현장에서 돌리는 식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국제개발 NGO들은 지역의 역량을 얕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좋은 것 가져왔으니 두고 보라’는 식이다. 지역을 배제하고, 지역민을 주눅 들게 하는 사업이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국제개발협력이 ‘땅 따먹기’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깃발 꽂기’ 전쟁이 된 것 같다. 먼저 꽂고 외치는 거다. ‘여기는 우리 땅!’ 마닐라 빈민촌만 해도 수십개의 NGO가 촘촘하게 구역을 나눠 사업한다. 누가 먼저 ‘모금 포인트’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빈곤 현장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를 고민하기보다 단체의 생존 자체에 방점이 찍힌 듯해 안타깝다.”
―타워빌은 아무도 깃발 꽂지 않은 땅이라 들어간 건가.
“정확하다(웃음). 어찌 됐든 집도 있고, 전기도 들어오는 곳이니 관심 주는 단체가 없더라. 물론 마닐라 빈민촌도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하지만 수많은 단체가 단발성 프로젝트를 잠깐 하고 돌아간다. 사업끼리 연속성도 없고, 단체 간 협력도 미미하다. 빈민들은 갈수록 도움받는 데 익숙해진다. 이래서는 지역이 살아나기 어렵다.”
―직접 쓴 책 ‘스마일 타워빌’을 보면 ‘주민 역량 강화’를 유독 강조한다.
“단체가 떠나도 지역은 남기 때문이다. 나나이들이 타워빌을 이끌 리더가 돼야 한다. 청년들 가운데 미래 먹거리를 찾아 키울 혁신가가 나와야 한다. 느리고 답답해도 지역에 리더십을 이양해야 하는 이유다. 캠프 조직들은 모두 주민들이 알아서 운영한다. 익팅만 해도 원단 수급, 제작, 생산, 영업, 납품, 회계까지 모든 과정을 나나이들이 처리한다. 태어나서 컴퓨터를 처음 봤다던 나나이가 이제 능숙하게 사업계획서를 쓴다.”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나도 머리가 다 셌다. 그래도 이 방향이 옳다. 캠프는 모든 사업의 의사 결정을 다수결로 정한다. 대표든 나나이든 한 표의 무게가 같다. 때로 여기서 황당한 결정이 나와도 ‘대의’에 따른다. 실패의 경험도 자립에 밑거름 된다고 믿어서다.
―캠프가 떠나도 타워빌은 지속 가능한가.
“올해가 ‘땅라우 프로젝트’ 개시 연도다. 앞으로 5년 안에 타워빌과 캠프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 목표다.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한 우산 아래 묶고, 사회적 경제 조직에 몸담지 않은 주민도 품을 예정이다. 조합원이 아니어도 ‘마을 청소’ ‘아이 돌봄’ 등 활동을 하면 무상 의료 서비스나 사회적 경제 조직의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혜택을 주는 식이다. 주민들이 스스로 타워빌 발전에 이바지하는 구조다.”
이 대표의 모바일 메신저 대화명은 ‘농부목사 이철용’이다. 국제개발협력도 농사에 빗대 설명한다. “천천히 영그는 곡식처럼 지역의 변화는 인내 끝에 찾아온다. 농부가 밭을 지키는 마음으로 늘 지역에서 지역민과 함께 숨 쉬어야 성공할 수 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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