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제주에서 피어난 무장애 여행… 이젠 하나의 산업으로

장애인 전문 여행사 ‘두리함께’ 이보교 이사 인터뷰

 

‘무(無)장애 여행’은 몸이 불편한 노인과 임산부, 장애인을 포함한 관광 약자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낯선 개념이지만,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접근 가능한 여행(accessible travel)’,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여행’ 등으로 불리며 일찍이 발전한 분야다. 유럽에서는 ‘접근 가능한 관광 네트워크(European Network for Accessible Tourism· ENAT)’가 조직돼 기업들이 장애인 여행을 기획·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국내에도 ‘차별 없이 모두가 행복한’ 무장애 여행을 꿈꾸는 ‘장애인 전문 여행사’가 있다. 제주도 및 국내를 기반으로 장애 유형에 맞는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무장애 관광 정보를 자문해 온 예비사회적기업 ‘두리함께’다. 지난 15일, 2015년부터 ‘무장애여행 불모지’와 같은 대한민국에서 길을 개척해온 두리함께의 창업자 이보교(52) 이사를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만났다.

지난 15일,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만난 이보교 두리함께 이사. ⓒ제주사회적경제지원센터

“무장애 여행은 목적지보다 과정이 중요한 여행이에요.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이동 차량부터 시작해 공항에서 휠체어를 어떻게 실을지, 가는 길의 바닥면은 어떤지, 휠체어 경사로나 장애인 화장실은 있는지, 장애인 칸의 위치는 오른편일지 왼편일지 등 하나하나의 과정이 끊이지 않고 사슬처럼 이어져야 합니다. 관광사업자의 안내와 도움이 필요한 부분인데, 이런 역할을 하는 곳이 없어 ‘두리함께’를 창업했습니다.”

사실 이보교 이사의 여행사 경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는 지난 20년간 글로벌 제약회사의 세미나 등을 도맡아 하는 마이스 산업(MICE·국제회의나 박람회 등 이벤트) 전문 여행사를 창업해 대표로 일했다. 화이자 같은 유명 제약회사의 사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콧대 높던 시절도 있었지만, 뒤이어 문을 연 온라인 여행사가 부도를 맞아 2010년 사업을 정리했다. 사업 실패와 생활고로 시름에 빠져 있을 당시, 제주의 한 중증장애인 사회복지법인에서 “여행사 경험이 있으니 법인의 장애인 여행 사업을 맡아달라”고 제안해왔다. 무장애 여행과의 첫 인연이었다.

대규모 기업 세미나도 척척 치른 그녀였지만, 장애인 여행 사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우선, 장애인 여행에 대한 제도나 시설적인 기반 등 기본적인 인프라가 전무했다. 주요 관광지는 물론, 대형 항공사조차 장애인 여행객에 대처할 내부 매뉴얼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보교 이사는 “장애인 여행객 한 분이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러 새벽부터 공항에 갔는데, 항공사에서 ‘사람 없는 낮 시간대에 이용하라’며 좌석을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면서 “식당에서는 ‘점심은 오전 10시 전에, 저녁은 오후 3~4시에 미리 먹으러 오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여행업 20년 경력의 이 이사는 사업을 맡은 지 6개월 만에 스트레스로 인한 난청 증세까지 겪었다. 사회복지법인에서도 결국 장애인 여행 사업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장애인 여행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다리를 다쳐 3개월간 목발과 휠체어에 의존하면서 잠시나마 장애인의 불편을 체감한 뒤로는, 장애인 여행 사업이 그에게 하늘이 내려준 ‘달란트’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이보교 이사는 결국 법인에 사직서를 쓰고 나와 또다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두리함께는 자체 특장버스 2대를 활용해 여행을 지원하고 있다. ⓒ두리함께

 

 

◇국내 대표 ‘장애인 전문 여행사’, 무장애 여행 불모지에 길 내다

지난 2015년, 두리함께를 창업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주도에서 휠체어로 접근 가능한 관광지를 사전조사하는 것. 이 이사는 지인들과 현장조사원처럼 줄자를 들고 관광지 모든 문턱의 높이와 길의 폭, 침대 크기나 화장실 등을 일일이 확인해 정보를 모았다. 이제는 자로 재보지 않아도 대략적인 수치를 가늠할 정도란다.

올해 초에는 여태껏 답사한 제주도 내 80곳의 관광지 정보를 한데 모아 ‘2018 무장애 관광지도’를 배포했다. 최근에는 이런 정보를 VR영상에 접목시킨 ‘무장애 VR(가상현실) 투어’ 콘텐츠를 페이스북에 공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같은 사람인데 휠체어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가고 싶은 맛집’이 아닌 ‘갈 수 있는 식당’을 선택하는 것은 차별”이라면서 “문턱 하나만 없애도 모두가 접근 가능한 장소가 되기 때문에 현장을 다니며 계속해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리함께는 이렇게 모은 관광지 정보를 바탕으로 지적·지체장애 등 장애 유형에 따른 맞춤형 여행코스를 안내한다. 빛이나 소리에 민감한 발달장애인은 체험형 코스로, 지체장애인의 경우 접근성이 좋은 관광지 위주로 구성한다. 휠체어 종류(수동·전동)에 따라 접근 가능한 코스도 다르다. 동행인이 활동보조인인지, 가족인지에 따라서도 여행 패턴이 달라진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의 힐링(치유)도 중요 사항으로 고려한다.

두리함께가 배포한 ‘2018 두리함께 무장애여행 안내지도’ ⓒ두리함께

지난해 4월부터는 계절별 여행 프로그램인 ‘온드림패키지’도 시작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진행되는 패키지는 한 회당 약 18~30명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데, 장애에 대한 이해도와 자체 특장버스(휠체어 리프트가 탑재된 장애인용 버스) 등이 소문이 나면서 올해는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1인당 비용은 평균 33만원 수준이다(2박 3일 일정 기준).

이보교 이사는 “지금껏 장애인 여행이 장애인을 복지의 대상으로 보거나, 정부나 기업 사회공헌의 이벤트성으로 진행돼왔다면, 온드림패키지는 장애인 여행객이 100% 비용을 내는 첫 상품”이라면서 “당사자에게는 적지 않고, 우리에게는 많지 않은 비용이지만,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주체적으로 여행할 기회를, 관광업체는 무장애 여행도 산업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수익성을 확인하자 현장 업체들의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장애인 여행객 역시 하나의 ‘소비 주체’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

“처음엔 장애인 전문 여행사를 만들고 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 장애인이 복지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소비 주체’로 인식하도록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년 동안 현장을 누비고 다녔더니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꿈쩍 않던 상인들이 자진해서 경사로를 설치하고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제 제주에는 장애인 화장실을 잘 갖춘 쇼핑센터가 생겼고, 요청한 지 하루 만에 화장실 문을 밖으로 열리는 구조로 바꿔준 곳도 생겨났어요. ‘혁신’이 일어난 거죠.”

두리함께가 지난해 4월 시작한 ‘온드림 패키지’의 참가자들이 제주도의 무장애 여행지를 여행 중이다. ⓒ두리함께
 

 

◇4200명 장애인 꿈 이룬 무장애 여행 날개 돋치려면… 정부 인증제 등 지원 필요해

올해로 4년차, 두리함께를 이용한 여행객은 4200여명. 이 중 40%(약 1600명)가량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최근에는 수익성을 엿본 일반 여행사에서도 하나둘씩 장애인 관광 상품을 시작했고, 두리함께가 지난 몇 년 동안 쌓아온 콘텐츠를 무단으로 복제해 여행사업을 벌이는 얌체 경쟁사도 있다고. 경영자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지만 장애인 여행에 대한 인식 변화가 놀랍기도 하단다. 재작년 말에는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되면서 직원 규모가 8명까지 늘었고, 일본과 전라도 여수 등 내륙으로도 여행 지역을 확장했다.

장애인 여행객들의 만족도는 어떨까. 이 이사는 “올봄에는 사고로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은 다섯 팀이 제주 여행을 왔는데 ‘사고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가는 꿈을 이뤘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면서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만족해서 두세 번씩 찾아오고, 주위에 소문도 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도 남아 있다. 우선 사업 모델 특성상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일반 여행사라면 공항 픽업을 1명이 담당해도 되지만, 두리함께는 휠체어 대여, 이동 보조 등 적어도 3~4명이 필요하다. 자원봉사자 지원이나 호텔 등의 장애인 고객 대응 매뉴얼 등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 한 채산성(손익을 따져 이익이 나는 정도)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보교 이사는 “공항에 여행객이 들어오고 나갈 때에만 반나절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면서 “부족한 인프라를 인력으로 대체하다 보니 다른 곳보다 직원들의 월급도 평균 30%가량 더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이보교 이사는 무장애 여행이 지속 가능하려면 장애인 여행 전문 인력 양성, 정부 인증제 등의 무장애 관광 산업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이사는 “직원 중 한 명이 한 관광지의 장애인 화장실이 잠겨 있기에 담당자를 찾아갔다가, ‘누구 허락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느냐’며 멱살을 잡혀 끌려나온 일도 있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녀는 “정부가 인증하는 배리어프리 여행사라는 최소한의 타이틀만 생겨도 현장에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라며 “무장애 여행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높아졌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리함께는 복지서비스를 기초로 한 관광산업으로서, 전국 262만명인 장애인 인구에다 돌봄이 필요한 노약자를 포함하면 고객층이 1000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어요. 앞으로는 어르신 장수여행, 중국의 장애인 여행까지도 유치해 나갈 예정이에요. 멀게는 제주도에 장애인도 편하게 족욕을 하며 바비큐를 먹을 수 있는 차별 없는 호텔을 짓는 것도 꿈입니다.”

 
 
제주=박혜연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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