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독점, 담합… 거대 제약사들의 횡포를 막을 방법

나탈리 에르놀 국경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정책국장 인터뷰

“평생 한두 차례 백신 주사를 맞으면 예방할 수 있는데도 매일 2500명의 어린이가 폐렴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왜냐고요? 백신 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죠. 평생 의사 얼굴 한 번 못보는 의료 빈민들에게 신약 개발, 의료 기술 발전 등등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폐렴은 전 세계 아동의 가장 큰 사망 원인 중 하나다. 매년 140만 명의 5살 미만의 어린이가 폐렴으로 목숨을 잃는다. 특히 저개발국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매년 약 100만명, 하루 평균 2500명의 아동이 폐렴으로 사망하고 있다. 무려 71%에 해당되는 수치다. 

ⓒpixabay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국제사회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나탈리 에르놀(Nathalie Ernoult·52) 국경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정책국장을 서울 강남구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비극은 비단 폐렴에서 끝나지 않는다”면서 “C형 간염, 후천성 면역 결핍증(HIV·에이즈), 인유두종 바이러스 감염증(HPV) 등 예방과 관리가 가능하지만 열악한 의료 시스템과 비싼 약값으로 치료가 이뤄지지 않는 케이스는 무수히 많다”고 했다.

또한 그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독점 등을 통해 약을 매우 비싸게 팔면서 필수 의약품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필수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는 데 한국 정부와 국내 제약사들이 주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에르놀 정책국장은 지난 20여년 간 기아대책행동(Action Against Hunger), 국경없는의사회 등에 활동한 국제 구호 전문가다. 기아대책활동 보스니아, 체첸 공화국, 서아프리카 사무소 등 다양한 분쟁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분쟁, 자연재해, 경제위기로 위기에 처한 지역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현재는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사무소에서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 캠페인'(Access Campaign, 액세스 캠페인)의 지역 정책 및 옹호(advocacy) 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또한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내 시민사회 위원회에서도 국경없는의사회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 민간 의료 인도주의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는 199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 상금으로 ‘액세스 캠페인’을 론칭했다. 개발도상국에서 꼭 필요한 약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도록 제약회사 등을 압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다. 

◇의약품은 사치품 아냐…필수 의약품의 지적재산권 기준 생겨야

독점과 담합 등 제약사들의 비윤리적 폭리를 저지할 방법은 없을까. 에르놀 정책국장은 일부 제약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며 이 같은 행위는 불합리한 특허 제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필수 의약품에서 폭리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의 ‘구멍’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다. 특허권 인정 제도와 필수 의약품 가격 선정 과정에 큰 구멍이 있다. 먼저 특허권의 경우, 특허의 인정 범위가 매우 넓을 때 문제가 생긴다. 각국 정부가 특허권을 엄격하게 심사하지 않으면 특허권이 있는 제약사가 판매를 독점하게 된다. 이는 가격 경쟁을 막고 필수의약품 가격을 상승시킨다. 예를 들어, 폐렴구균 백신은 글로벌 제약기업인 GSK와 화이자만 생산하고 있는데 화이자의 경우 백신을 투약하는 양, 백신을 담는 용기까지 특허권을 냈다. 즉, 특허 신청 범위가 매우 넓은 것이다. 그런데 이 특허 신청이 다 받아들여지면 복제약(제네릭)을 만드는 다른 제약사들은 사사건건 화이자의 특허권에 걸려 복제약을 출시할 수가 없다.

지난해 화이자는 중국과 유럽에서 폐렴구균 백신 특허권 재판에서 졌다. 해당 정부가 폐렴구균 백신은 이미 많은 제약사에서 개발이 된 데다 특허의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한국 정부는 화이자 폐렴구균 백신 특허권을 인정했다. 이에 국내 최초로 폐렴구균 백신을 개발한 SK케미칼이 지난해 화이자를 상대로 특허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SK케미칼은 특허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다시 상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 정부가 특허권 심사에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 2일 나탈리 에르놀 국경없는의사회 액세스 캠페인 정책국장을 서울 강남구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소에서 만났다. 그는 “제약사들의 특허권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경없는의사회

-가격 선정 과정에서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적정 이윤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보통 의약품의 출시 가격에는 연구개발비, 마케팅 비용, 생산비용 등이 포함되는데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이 매우 폭력적이다. 일부 제약사들이 해당 질병군 환자가 얼마나 있는지, 이 의약품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안 죽고 살려면 얼만큼 돈 낼래?’식으로 가격을 흥정한다. 그런데 기업들이 필수 의약품 가격을 낮춰서 판매할 ‘의무’는 없다. 정부가 기업들의 담합과 독점으로 인해 가격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관리 감독해야 한다. 정부는 특허권을 엄격하게 심사해 가격 경쟁을 유도하거나 폭리를 취하는 제약사에 규제를 가하는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아예 제약사가 가격을 낮추게끔 혜택을 주는 방식도 있다. 기업이 지적재산권에 의한 독점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다른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의 제약 연구개발(R&D) 지원 기금에서 공공에서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질환군의 연구개발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도 방법이다. 최근 한국 보건복지부에서 의약품 개발을 위한 기금(Research Investment for Global Health Technology, RIGHT)을 조성하기로 발표했다고 들었다. 한국 정부가 기금의 절반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필수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개발에도 많은 지원이 이뤄지길 바란다. 다만 의약품의 가격을 개발 전에 책정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목표 가격을 설정해두면 공정과정에서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의약품 개발을 위한 기금은 정부가 50%를 지원하고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와 국제기구가 각각 25%를 출자해 민관협력으로 조성됐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멀린다 게이츠가 설립한 세계 최대 민간재단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도 참여한다. 기금은 500억원 규모로 조성되고 이 중 국제기구 몫인 25%는 게이츠 재단이 지원할 예정이다. 정부는 내년 기금을 출범해 5년간 운영하고 감염병 진단약, 백신, 바이오신약 연구개발과 글로벌 시장 진출에 투자할 계획이다.

한국은 의약 시장과 접근성에서의 ‘중간자’ 역할할 것

-‘자유시장경제에서 과도한 규제다’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데.

“의약품은 사치품이 아니라 공공보건을 위해 존재한다. 의약품 구입은 휴대전화를 살까말까하는 고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 FTA의 지적재산권 관련 조항에서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조항에 따르면, ‘건강은 재화가 아니기에 돈과 맞바꿔서 무역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시, 필수 의약품 등 공공보건과 관련된 제품에 한해서 지적재산권 적용에 유연성을 갖자는 내용이 담겼다. 간단히 말하면, 감염병이 창궐하면 정부가 컨트롤타워가 되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일은 ‘재난적 지출’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책적인 힘, 세금 등등 수많은 방식을 통해 관리감독을 해야만 한다.”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국제사회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

-국제 사회는 필수 의약품 접근성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나.

“2014년 C형 간염 백신 사태 이후 국제 사회에서는 필수의약품 접근성을 높이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2014년에 길리어드 사이언스가 개발한 신형 C형 간염 백신은 기존 의약품과 달리 복용기간이 짧고 부작용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생산단가가 120달러(약 12만9000원)에 불과함에도, 미국 출시 가격은 무려 8만4000달러(약 9013만2000원)였다. 선진국에서도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 C형 간염 환자 중에서도 말기 환자한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필수 의약품 접근성 문제의 심각성을 선진국도 공감한 것이다. 이후 유럽연합(EU)은 일관된 방향으로 기업들에게 필수 의약품 가격 하락을 ‘권고’하고 있고 최근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무역 협상에 있어서 의약품의 경우 특허권 및 지적재산권 적용에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국제 사회의 압력은 특허권의 엄격한 심사, 필수 의약품에 대한 지적재산권 적용의 유연성 등 제도를 변화시켰고, 결국 의약품 가격의 판도를 바꿨다. 대표적 예가 에이즈 치료제다. 에이즈를 치료받는 환자는 2001년 10만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그 수가 2090만명까지 늘어났다. 제네릭의약품의 등장으로 제약회사 간 가격 경쟁이 발생해 치료제 가격이 내려갔고, 공급이 활성화됐다. 이에 따라 2005년보다 현재 에이즈 관련 사망률이 48%나 감소했다.”

‘국제사회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 정책토론회가 지난 3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이날 조태익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관, 유제만 신풍제약 대표이사, 나탈리 에르놀 국경없는의사회 정책국장, 권순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권혜영 목원대학교 의생명보건학부 교수, 배승진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정우용 한국국제협력단 사업개발이사가 토론자로 나섰다. ⓒ국경없는의사회

한편, 지난 3일 국경없는의사회는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국제사회 필수의약품 접근성 강화를 위한 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의약품 및 백신의 접근성을 막는 여러 정책적 장벽과 대안과 특히 한국의 잠재적 역할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에르놀 액세스 캠페인 정책국장을 비롯해 유제만 신풍제약 대표이사, 권혜영 목원대 의생명보건학부 교수, 배승진 이화여대 약학대학 교수, 정우용 한국국제협력단 사업개발 이사, 조태익 보건복지부 국제협력관 등이 토론자로 나서서 발제 및 토론을 이어갔다.

-국회 토론회에서 한국 정부와 제약사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들었다.

“한국의 역할은 한마디로 ‘중간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모범적인 공적 의료제도를 가진 나라인데다, 한국 제약사들은 수준 높은 기술로 기성 글로벌 제약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 유럽 등 글로벌 제약사처럼 의약품 가격 장벽을 세운 나라도 아니다. 즉 제약산업에서 ‘기득권’도, ‘저개발국’도 아닌 중간지점에 서 있는 거다. 더욱이 한국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도 경험했으면서도,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나라다. 선진국과 개도국, 양쪽의 입장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한국이 거대 제약시장을 가진 선진국과 의약 지원이 필요한 개도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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