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뚝이는 걸음, 삐딱한 고개, 각기 다른 시선처리… 남들과 다르거나 혹은 더뎠던 몸짓이 춤이 됐다. 무대를 가득 메운 ‘무용수’의 움직임 앞에 뇌병변·지적장애·지체장애·청각장애·발달장애 같은 ‘무대 밖’ 구분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두운 공간 환한 조명 아래, 펄럭이는 옷을 입고 무대를 거니는 무용수들의 동작은 저마다 같고도 달랐다. 각각의 동작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됐다. 지난 28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선보인 현대무용 ‘시선 1+1’ 공연 현장, 장애인으로 구성된 국내 첫 현대무용단 ‘케인앤무브먼트(CANE & Movement)’의 창단 공연이다.
국내 첫 장애인 현대무용단을 구성한 건 사단법인 트러스트무용단의 김형희 안무가. 사실, 20여년째 그가 이끌어오는 트러스트무용단은 우리나라 현대무용단 중 유일하게 2000년 이후로 장애인 무용수가 소속돼 있다. 그가 장애인 현대무용단을 따로 창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음을 치료하는 무용수’ 김형희 트러스트무용단장 인터뷰 바로가기
“장애인 국제무용제에 초청할 장애인 예술팀을 둘러보러 유럽에 갔다가,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벨기에의 씨어터 스탭(Theater Stap)이란 팀은 다운증후군, 지체장애, 지적장애를 가진 이들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한 시간 넘는 공연을 오롯이 이끌어가요. 움직임이 진실되고 아름다워, 너무 감동이었어요. 독일엔 다운증후군을 가진 이들로만 구성된 무용단도 있는데, 역사가 25년이에요. 트러스트 무용단에 속한 장애인 무용수가 총 네 명인데, 공연을 할 땐 일반 무용수가 다수고 그 사이에 섞여 있었거든요. 그간 ‘장애인도 춤 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이들에게 내 스스로 한계를 지웠던 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됐어요. 지금이라도 당장 해야겠다 했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원래 뭐든 한번 ‘해야겠다’ 싶으면 돈 생각 떠나서 일단 하고 본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지원하는 ‘2017년 장애인 문화예술 인력역량강화사업’에 트러스트무용단이 선정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지난 4월부터 무용단에서 공연을 함께 할 ‘장애 무용수’를 모집했다. 장애 무용수업으로 연이 있었던 서울 중구 장애인복지관이나 파라다이스복지재단에서도 관심있는 이들을 알음알음 소개받았다. 트러스트무용단에서 활동하던 장애 무용단원들도 합류했다. 그렇게 모인 10명의 장애 무용수에, 공연에 함께 올라갈 트러스트무용단 비장애 무용단원 두 명까지, 7개월에 걸친 훈련이 시작됐다. 그는 “정식 공연이 목표이다보니, 무용수들과 같이 훈련하며 달리기, 스트레칭 등 몸을 쓰고 동작을 만드는 훈련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비장애 무용수와 작업하는 것보다 에너지가 3~4배는 많이 들었다는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그만둬야 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왔던 날도 있었다”고 했다. 각각 지닌 장애가 다르다보니, 한번 설명하면 될 것도 서너번씩 눈을 맞추고 설명해야 했다. 눈맞춤을 힘들어하는 이들도, 똑같은 질문을 스무번씩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하면 할수록, ‘장애가 있다는 게 뭐고, 비장애가 뭔지’ 경계가 불분명해졌다”고 했다.
“사실 현대무용이라고 하면 되게 ‘멋지고 그럴듯하게’ 추는 것만 말하는 것 같지만, 기교만 있고 감동이 없을 때도 많아요. 각자가 가진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확장하고, 속에 든 걸 표현하는 게 저는 곧 춤이라고 생각해요. 그럴때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고요. 장애를 가진 분들과 작업해보면 보통 사람들은 ‘아닌척’ 숨기는 감정들을 투명하게 드러내요. 움직임이 비장애인만큼 자유롭진 않아도, 그 자체로 진실되고요. 화려하진 않지만 큰 울림이 있어, 꼭 해야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돌발적인 상황 모두가 하나의 ‘춤’이 되어 작품에 녹아들었다. 다음 안무를 위해 움직이는 시간은 서로를 보며 확인하기로 했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고민하고,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춤이 됐으면”하는 안무가의 바람에서였다. 청각장애무용수 김민수군의 엄마도 무대에 섰다. “아들보다 하루는 더 살았으면” 바랐던 마음속 응어리를 무대 위에 꺼내놨다. 누군가 갑작스레 무대에 누우면 눕는대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원을 그리는 등, 서로의 움직임은 무대 위에서 연결돼 하나의 작품이 됐다.
“공연을 마치고,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 교장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틀에 짜인 안무가 분명히 아닌데, 몸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데서 크게 감동을 받으셨대요. 팜플릿에 적힌 계좌로 몇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들도 있었어요. 20여년 무용단 했지만 처음 있었던 일이에요. ‘캐인앤무브먼트’는 자연스러운 몸의 확장이라는 영어의 앞글자를 따오기도 했지만,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해요. ‘장애, 비장애’를 선갈라 긋고 차별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의 춤을 통해 ‘모두가 동일한 사람’ 이라는 사실을 곱씹게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