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어려운 이들 도울수록, 내 인생 바뀌고 뭐든 할 수 있는 힘 생겨”

자원봉사 365일… “우리에겐 최고 선물” 해외자원봉사단 5인을 만나다 _ 필리핀·이집트 등 1년간 자원봉사 아프리카에서 마을 축제 기획하고 _ 필리핀에서아이들 교육 봉사해 “우리가 그들보다우월하다 생각 말고 초심 잃지 마세요 자신 돌아보는 기회자원봉사, 도전하세요” 소외된 이웃을 찾아 떠났던 지난 1년. 나누고자 갔던 그곳에서 마음 가득 선물을 받고 돌아온 해외 자원봉사단원 5명을 만났다. 진로 고민, 취업 걱정을 뒤로하고 탄자니아, 이집트, 필리핀, 인도에서 뜻깊은 경험을 하고 돌아온 이들이 낯선 땅에서 시간을 보낸 이유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씨앗’이 되기 위해서였다. 단원 5명 모두 어릴 때부터 노인·아동·장애인 봉사는 물론, 짧게는 2주 길게는 6개월까지 네팔·캄보디아·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 등 해외 자원봉사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이들은 “국내부터 시작해 해외 단기·중기 봉사를 하고 나니 더 오랜 기간 새로운 땅에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8월부터 1년 동안 인도에서 자원봉사를 한 조아라(24)씨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뉴델리역 첨단 시설 뒤편에서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이 지내는 사람들을 만났다”며 “외국인인 나를 보고 도망다니던 아이들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을 보면서, 인도의 지역사회 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아라씨처럼 우리 젊은이들은 인생을 바꾸는 다양한 경험을 해외 자원봉사에서 찾고 있다. 2010년 기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해외에 파견되는 자원봉사자 수는 1000명에 달한다. 10년 전(126명)의8배에 이르는 수치다.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를 통해 해외 봉사를 경험한 사람도 2000년 16명에서 지난해 619명으로 약 38배가 늘었다. 특히 아프리카로 향하는 청년 수가 크게

5년 새 봉사자 수 3배 늘었지만 질적 수준은 제자리걸음

자원봉사 현주소 작년 봉사자 630만명 그중 중고생 100만명 진정성·배려심 없이 시간 채우기식 빈번 수혜자에겐 큰 상처 돼 한국자원봉사센터중앙회의 통계에 따르면 자원봉사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 2010년 12월 기준으로 630만명(등록인 기준)을 넘어섰다. 2005년까지 등록된 자원봉사자 수는 208만명. 5년 사이에 무려 3배가 증가했다. 그렇다면 자원봉사의 질적 수준도 높아졌을까. 노인, 장애인, 아동 등 대인 관계에 초점을 맞춰 봉사활동이 벌어지는 지역 자원봉사센터와 사회복지관의 자원봉사 실무자를 만나 자원봉사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실무자들은 자원봉사의 확대를 반기면서도 잘못된 자원봉사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잘못된 봉사활동의 첫 번째 유형은 수혜자에 대한 이해가 없는 봉사활동이었다. “얼마 전 ‘자원봉사자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는 항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장애인 가정을 방문한 봉사자가 집안이 너무 지저분하다며 청소를 했는데, 그분이 시각장애인이셨거든요. 물건들이 본인이 기억하는 장소에 없어 놀라셨더라고요.” 자원봉사에 앞서 수혜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필수다. 봉사자가 보기에 사소한 것이라도 수혜자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장애인 봉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인 분들은 본인이 쓰던 물건에 대한 애착이 크기 때문에, 봉사자들은 아무리 낡은 물건이라도 함부로 버려선 안 된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추억이 버려졌단 사실에 어르신들은 몇 개월 동안 가슴앓이를 하신다고 한다. 새것, 더 좋은 것을 선물해도 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파주시 자원봉사센터 김영선 소장은 “장애인 봉사활동의 핵심이 자립을 돕는 것이라면 어르신들은 본인의 고집과 의견이 존중받길 원하신다. 같은 수혜자라도 봉사활동에 대해 장애인과 어르신들의 욕구가 다를 정도로 수혜자들은 다양한 욕구를

벽돌 수백장 나르고 700원밖에 못 받는 소녀

배우 이정진의 네팔 자원봉사 벽돌공장 노동자는 대부분이 어린 아이… 기본 교육도 못 받아 꺼이랄리 미래 위해 지속적인 관심 필요 지난 5월 배우 이정진(34)씨가 네팔 오지로 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2009년 방글라데시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그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빈곤아동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올해로 세 번째, 이정진씨는 어김없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그가 직접 전해온, 네팔에서 만나고 느낀 나눔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인천공항에서 7시간의 비행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국내항공을 타고 2시간, 다시 차로 3시간을 이동해 최빈국 네팔에서도 더욱 가난한 마을로 꼽히는 꺼이랄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엄습해왔다. 4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 숨이 턱턱 막혔다. 꺼이랄리는 땅이 척박해 과거 노예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 사람들을 ‘옛날 노예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10여 년 전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꺼이랄리 주민들의 삶은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는 ‘절대빈곤’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는 꺼이랄리에서 급식, 교육, 의료 지원, 소득증대 활동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전까지 나에게 네팔은 그저 신비롭고 장엄한 히말라야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꺼이랄리와 같은 풍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충격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 나는 바로 현지 굿네이버스 지부장님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첫 번째로 만난 아이는 연로한 할머니와 살고 있는 13살의 소녀 상기타(Sangita)였다. 두

자원봉사자가 모여 창고를 카페로…”티베트 어린이들의 록빠(rogpa: 친구, 돕는 이)가 되고 싶어요”

록빠 2호점 ‘사직동 그 가게’ 봄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를 따라 손님들이 앉아 있다. 토스트와 음료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람들은 기자가 들어서자 하던 얘기를 멈추곤 인사를 건넨다. 환한 웃음에 이끌려 얼떨결에 손님들 무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저만치 사라진다. 카페에선 인도의 다람살라에 사는 티베트 여성들이 수공예로 제작한 스카프나 지갑을 비롯한 다양한 소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사직동의 카페 ‘사직동 그 가게’다. ‘사직동 그 가게’에는 사연이 있다. 사직동 그 가게의 모태는 인도의 다람살라에 있는 록빠(rogpa.com) 1호점이다. 다람살라에는 달라이 라마가 세운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고 티베트의 난민들이 티베트의 정신문화와 언어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이 다람살라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특히 이곳에 위치한 록빠 1호점은 인도를 찾는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록빠(rogpa)는 ‘친구’, ‘돕는 이’라는 뜻이다.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난민의 아이들을 돌보며 자원봉사를 하던 한국인 빼마씨가 남편과 함께 탁아소를 건립한 것이 그 시작이다. 탁아소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빼마씨는 엄마들, 특히 싱글맘들에게 일자리가 있어야 제대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성작업장을 만들었다. 여성작업장에 재봉틀을 놓고 9명의 엄마들이 지갑이나 스카프를 만드는 동안 아이들은 공부를 한다. 2005년 이후 지금까지 록빠는 어린이 도서관을 짓고 지역 페스티벌을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이것은 모두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의 봉사활동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사직동 그 가게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작업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빼마씨가 고민을 털어놓자

“사고 후 지체장애 판정… 봉사하면서 마음이 더 건강해졌죠”

경희대 정영현씨 3년째 월드비전 자원봉사 “정신적으로는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자원봉사가 저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 기회가 되겠구나 싶었죠.”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경희대 경영학과 정영현(25)씨는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새하얀 피부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정씨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지체장애 1급이라고 했다. 정씨가 장애를 갖게 된 것은 2006년 1월, 수능을 치고 나서 대입 논술고사를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목이 부러져 목 아래로 몸이 마비됐고, 눈을 다쳐 시야까지 좁아졌다. 그나마 양팔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치료를 받느라 대입논술은 포기해야 했다. 정씨는 그 후 1년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졌다. 스무 살의 봄은 병원에서 맞았다. 주먹을 쥐지 못하는 손으로는 실험도 할 수 없어 ‘신약개발연구원’이 되겠다던 꿈도 접었다. “사고 후 ‘죽고 싶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옆에서 계속 우는 엄마와 가족들을 보면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왕 살 거면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그때부터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 됐고요.” 정씨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2008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9학년도에 경희대 교정을 밟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무엇보다 자원봉사에 열심이었다. 정씨는 올해로 3년째 국제구호개발 NGO인 월드비전에서 편지번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후원 아동들이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하는 것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아이들이 쓴 편지를 읽다 보면 저까지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아이들이 ‘후원자님 덕분에 꿈을 갖게 됐고, 공부도

더나은미래 특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