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고액기부 시대 만나는 비영리단체들의 고민

한두 달 전쯤, 비영리단체의 젊은 간사들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애로사항을 자연스럽게 털어놓았는데, 한 단체의 간사가 재밌는 얘기를 했습니다. “서울의 송파·강남·서초 권역의 지부를 맡고 있는데, 이 지역의 고액기부자들을 따로 관리해보려고 본부 후원관리팀에 물어봤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 본부 후원관리팀에선 그 데이터베이스 자체가 자신의 실적이기 때문에 빼앗기는 걸 싫어한다. 고액기부자 관리는 해당 지부에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하더군요. 신년을 맞아 더나은미래 팀원들은 ‘향후 5년 기부&모금 트렌드’ 전망을 듣기 위해 모금액 100억원 이상 대형 NGO 9곳의 모금 전문가들을 만났습니다. 예상대로 고액기부 시대 준비가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 본부를 둔 인터내셔널NGO와 달리, 토종 NGO들은 “최신 모금 기법과 기부자 관리, 세무와 법무 등 거액 모금에 경험이 없어 고민” 이라고 했습니다. 위 사례와 같이 고액기부자 관리를 본부에서 할 지 해당 지부에서 할 지 등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논의를 아직 시작조차 못하는 상황입니다. 고액기부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초기에는 대학교나 병원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모교를 발전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영리단체 또한 곧 고액기부자를 모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영리단체의 질적 전환이 또 한 번 요구될지도 모릅니다. 최영우 도움과나눔 대표는 “서울대의 외부 발전위원이 60명가량인데, 시어머니가 60명이나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이 열려 있지 않으면 쉽지 않다”며 “임기 제한 규정이 없는 비영리단체의 이사회 문제, 늘 제기되는 회계 투명성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작은 칭찬 한마디가 아이들의 닫힌 마음 열어

“철판이 뽑혀 나오는 기계래요. 이걸 보는 순간, 그냥 아빠 생각이 났어요.” 중학생 여자아이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IMF 때 사업이 망한 아빠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사진 속에는 서울 문래동에서 발견한 기름때 묻은 공장기계가 있었습니다. 아이와 저는 이 작품 제목을 ‘아빠’라고 붙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활짝 웃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저와 더나은미래 기자들은 서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일일강사를 했습니다. 두산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시간여행자’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청소년 60명은 지난 5개월 동안 사진과 역사를 배우고, 서울 문래동과 부암동 등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년 1월이면 이 작품은 전시회에 걸리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작품집에 실릴 에세이를 직접 쓰도록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 아이는 온통 새까만 바탕에 하얀 국화꽃 사진을 대표작으로 골랐습니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 “그냥 흰 국화꽃이 좋아서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상처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1지망으로 원했던 고등학교에 떨어졌어요. 2지망 고등학교 원서를 넣고 오는 길에, 제가 가고 싶었던 1지망 학교에 원서를 넣으려고 깔깔대며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속상해서 죽고 싶었어요. 이 꽃을 그 아이들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었어요.” 에세이 제목을 ‘2지망’으로 정했습니다. “네 얘길 써보라”는 말에 아이는 “정말 이 얘길 써도 돼요?”라고 반문하더니, 나중에 멋진 에세이 한 편을 만들어왔습니다. ‘문화역 서울 284′(구 서울역사)라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습니다. 어지럽게 엉켜 있는 전선과 콘센트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촬영한 아이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친구들과 갈등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뜬구름 잡는 보육 정책, 부모들만 ‘끙끙’

가히 전쟁입니다. 둘째 딸 유치원 보내기 말입니다. 발품 팔아 정보 모으고, 눈치작전으로 원서 넣고, 당첨돼도 유치원비에 ‘억’ 소리 나는 게 대학 입시 전쟁 못지않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선 ‘눈치’가 빨라야 살아남습니다. 만 3세까지만 있는 가정어린이집에 보낼 때, “미리 5세반이 있는 다른 어린이집에 등록해둬야 한다”는 조언을 흘려 들었습니다. ‘설마’ 했죠. 지난 11월부터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알아보며,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며칠 전, 한 어린이집에 원서를 넣으러 갔더니 “어머니, 어차피 넣어봐도 안 되니까 그냥 가세요” 하더군요. 서울시 보육 포털 서비스에 들어가, 어린이집에 대기 등록하니 한 곳은 37명, 또 한 곳은 120명 넘게 줄 서 있더군요. 유치원은 더 가관입니다. 근처 공립학교 유치원은 모조리 반일반(9~1시)뿐이었습니다. 공짜라고 해도, 직장맘에게 ‘그림의 떡’입니다. 사립 유치원은 70만~90만원대의 학원비를 자랑합니다. 대개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하는, 하루 5시간 교육비치곤 너무 비쌉니다. 청소년수련관에서 운영하는 유아 체능단에 접수, 저녁 9시 무렵 추첨을 하러 갔습니다. 작년까지는 선착순이어서 “새벽 2시부터 줄 섰다”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올해 교육부의 ‘선착순 금지’ 지침 때문인지 추첨제로 바뀌었더군요. ‘김○○’. 추첨 항아리에서, 제 딸아이의 이름이 불리자 환호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날 추첨이 끝난 강당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습니다. 접수만 해놓고 당일 추첨에 참가 못한 이들을 두고, ‘당첨된 것으로 봐야 한다’ ‘추첨 의사를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등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탈락한 부모들은 “재추첨하라”고 소리를 높여 결국 재추첨이 벌어졌고, 결국 이미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초고속 성장… 그러나 ‘품격’ 갖춰야 할 때

“야영장에 도착한 아이들에게 차에서 내리는 순서대로 세계 각 나라의 국적을 부여한다. 국적이라는 것이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프랑스나 일본 등 부자나라 국민이 된 아이들은 밥과 반찬, 물, 담요 등을 풍성하게 받고, 수단 등 가난한 나라의 국적을 받은 아이들은 캠프 기간 내내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지내게 된다.”(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중에서) 지난주 한비야씨와 존번 델라웨어대 교수를 만난 후 저는 ‘나라의 품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겐 ‘사람의 품격’이 있듯, 나라에도 ‘나라의 품격’이 있겠지요. 품격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고위직에 있다가 은퇴해보면, 세상살이의 쓴맛을 제법 느끼게 된다고 하지요. 저도 한때 그런 상처 아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더나은미래’ 편집장이 된 후, 조선일보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 시절 친분이 있었던 몇몇 취재원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기자직을 뒤로한 지 4년 만에 복귀한 저는 ‘순진하게도’ 그들도 반가워할 줄 알았습니다. “우와~ 반가워요. 이게 얼마 만이야? 언제 한번 밥이나 먹어요.” 이런 멘트를 날린 상대방은 일주일이나 이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필요에 의해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의해 사람을 버리는 ‘진짜 세상’이 좀 느껴지더군요. 덕분에 중요한 교훈도 얻었습니다. 경찰청 출입기자, 한나라당 출입기자라는 알량한 권력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저를 ‘인간 박란희’로 대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을 권력·지위의 높낮이로 판단하지 않는 것, 강자에게 약해지지 않고 약자를 배려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주위에 나누어주는 것. 진짜로 품격 있는 사람은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여성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일·가정 양립 가능한 사회

“형님, 혹시 일요일 오후에 잠깐 저희 애들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지난 18일, 저는 다급히 몇 통의 전화를 돌렸습니다. 더나은미래는 2주에 한 번씩 일요일 오후에 지면제작을 합니다. 그때마다 남편이 애들을 돌보는데, 이번 주 갑작스레 남편의 일정이 잡힌 것입니다. 급하게 베이비시터를 섭외하기 시작했습니다. 1)시누이.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산행이 잡혀 있었습니다. 2)손윗동서. 난색을 표하며, 어쩔 수 없으면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차량에 아이 둘을 태워 경기도까지 왔다갔다 해서 번거로움과 부담감에 포기했습니다. 3)큰딸 친구 엄마. 아홉 살짜리 큰딸은 문제없지만, 손이 많이 가는 네 살짜리까지 부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4)내가 직접 회사에 데리고 간다. 2주 전에도 애 둘을 데려갔는데, 또 그러기엔 엄두가 안 났습니다. 충청도의 시어머니, 경상도의 친정엄마까지 목록에 올렸다 지웠습니다. 결국 믿을 구석은 저한테 월급 받는 ‘또 하나의 일하는 엄마’인 베이비시터뿐이었습니다. “주말엔 안 봐주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 봐준다”고 했습니다. 고마움, 서러움, 분노, 억울함까지 북받쳐서 눈물이 좀 나왔습니다. 하루 전날, 식사자리에서 지속가능한 기업을 위한 컨설팅을 담당하는 A씨를 만났습니다. 아빠가 된 지 얼마 안 된 그는 “추석에도 시골에 못 가고 일했다” “일주일에 하루도 집에 못 들어가서 아내가 속옷을 챙겨서 회사에 온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A씨의 상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습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 “그래서야 지속가능한 가정이 유지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저와 절친한 워킹맘 2명이 아이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20~30년 후 딸들이 살게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다른’ 건 ‘틀린’ 것 아냐… 다른 의견 표현할 줄 아는 ‘용기’ 가져야

1968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와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사인 제인 엘리어트는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흑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운 마틴 루터킹 목사가 암살된 다음 날이었지요. 그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합니다. 푸른눈과 갈색눈 두 그룹으로 나눠, 금요일엔 푸른눈이 열등한 그룹이 되고 월요일엔 갈색눈이 열등한 그룹이 됩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차별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학급에서 가장 인기있던 푸른눈의 소녀는 첫날 열등한 그룹이 되자, 갑자기 구부정하게 걸었고 행동이 어색해졌고, 수업을 따라오기 힘들어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갈색눈 친구가 일부러 뻗은 팔에 등을 부딪쳤습니다.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까, 네가 사과해야 해.” 갈색눈 친구의 도전적인 태도에 푸른눈 소녀는 웅얼거리며 사과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함께 놀자고 열등한 푸른눈 그룹 친구를 초대한 갈색눈 아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벌어진 상황에 엘리어트는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이 실험은 이후 다큐멘터리로 상영돼 미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푸른눈, 갈색눈'(한겨레출판)이란 책을 읽으며, 얼마 전 초등학교 2학년 딸의 학교에 독서명예교사로 1시간 동안 수업을 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첫 번째 남자아이가 ‘야구선수’라고 답하자, 그 옆의 아이도 ‘야구선수’, 그 옆의 아이도 ‘야구선수’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축구선수’라고 했습니다. 여자아이 한 명이 ‘디자이너’라고 말하자, ‘간호사’라고 답한 아이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디자이너’를 말했습니다. 30년 전 저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봤습니다. ‘대통령’ ‘미스코리아’ 같은 다소 황당하고 거창(?)한 답변을 하는 친구 몇 명은 꼭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NGO는 대행사 아냐 함께 가야 할 동반자

언론사에 있다가 1년 남짓 NGO에 몸을 담갔을 때, 저는 꽤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직원들이 젊고 이직이 많았으며, 연봉은 처절하게 낮았습니다. NGO는 그야말로 사람 하나하나가 ‘일당백’을 해야 하고, 그 사람 하나가 빠지면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밀려올 만큼 공백이 크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의 ‘생태연구소’를 가보니, NGO임에도 멋진 건물에 공무원보다 많은 월급과 전문성을 갖춘 조직이었습니다. ‘NGO 직원은 좋은 일 하려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가는 사람들이니까, 적은 월급을 감내하면서 사는 건 당연하다’ 혹은 ‘NGO 직원들 월급에 쓰려고 내 후원금의 일부를 떼가는 건 말이 안 돼’ 하는 생각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NGO란 원래 정부가 모두 커버할 수 없는 복지·교육·지역사회·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전문조직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돈’이지요.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 임직원은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월급을 받습니다. NGO는 그 취지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내는 후원금으로 운영되지요. 해외의 NGO들은 우리처럼 늘 ‘을’만은 아닙니다. 그냥 파트너이지요. 정부가 직접 하기 힘든 사업을 할 때, 기업이 사회공헌을 함께 하려고 할 때 찾는 파트너입니다.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NGO가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업 사회공헌의 현실과 대안’ 시리즈를 하면서, 화가 날 때가 많았습니다. 각 기업의 실명을 일일이 밝히고 싶었지만, 해당 NGO에서 “큰일 난다”고 해서 익명을 써야 했습니다. ‘돈’이 어디서 오느냐에 의해 모든 갑을 관계가 결정된다면, 공무원이나 NGO나 모두 ‘을’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NGO는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미래세대를 위한 안전한 에너지 고민해야

“독일 남부지방에선 아직도 버섯 재취를 하지 못합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가 독일인들에게 잊혀가던 25년 전 체르노빌 사고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지난해 6월 말 독일에서 만난 미란다 슈로이어 베를린 자유대학 환경정책연구소장이 한 말입니다. 당시 저는 일주일 동안 독일의 에너지 관련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메르켈 총리가 “2022년까지 17기의 원전을 모두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 주된 궁금증이었습니다. ‘도대체 독일 전력의 23%나 담당하는 원전을 폐쇄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싶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정재계·종교계·시민단체 등이 주축이 된 ’17인 윤리위원회’에 원전 찬반 결정을 맡겼고, 공영방송에서는 11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으며, 이 같은 여론수렴 결과 ‘완전 폐쇄’ 결정이 났다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재생에너지로 충분히 원전의 전기를 대신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1998년 4.8%였으나 10년 만에 3배에 가까운 17%까지 늘어났고, 2050년에는 80%까지 높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약 6만원가량의 전기료가 인상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독일인 다수는 ‘전기료 인상’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대 간 형평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세대가 편하게 전기를 쓰기 위해 안전성도 보장되지 않은 방사성폐기물을 후세대에 전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2주 전 찾은 일본 도쿄에선 한여름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일본은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로 54기의 원전 중 17기가 폐쇄됐고, 나머지도 안전점검을 위해 가동을 멈췄습니다. 일본에선 전력부족으로 공장의 해외 이전 등 국가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와, 방사선 공포 때문에 원전 재개를 결사반대하는 목소리가 부딪치고 있다고 합니다. 눈을 돌려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무조건적 ‘혜택’보다 낯선 땅에서의 적응 도와줄 ‘시스템’ 만들어야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다문화 취재를 통해 만난 몽근졸씨와 저는 말이 아주 잘 통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그건 정말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입니다. 2008년 여름부터 2년 동안 저는 미국에서 소위 ‘다문화 여성’으로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다섯 살짜리 딸아이를 프리스쿨(어린이집)에 맡기고 돌아서면서 저는 선생님께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맴돌았지만 그냥 웃으며 “굿 모닝(Good Morning)”만 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선생님과 낄낄거리며 대화하는 미국인 학부모를 보며 자괴감을 느껴야 했지요. 마트에서도 “Plastic or Paper?(비닐봉지, 아니면 종이봉투에 담아갈래?)” 하고 재빠르게 묻는 종업원의 말을 못 알아들어 창피당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서커스장에서 모든 관객이 일어나 미국 애국가를 부르는 통에 우리 가족만 어색한 채 입만 벙긋벙긋한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 스케줄을 채워줄 다양한 프로그램이 눈에 보였습니다. 월요일엔 도서관, 화요일엔 초등학교, 수요일엔 지역 커뮤니티센터, 목요일엔 미국인 자원봉사 할머니집, 금요일엔 교회를 다니며 생활영어를 배웠습니다. 도서관에서 40년 넘게 자원봉사로 일한 70대 애비(Evy)할머니 부부는 매주 목요일 자신의 집으로 저와 몇몇 한국 여성들을 초대해 토크타임을 갖고, 미국 문화와 미국 생활에서 겪는 아주 사소한 어려움을 상담해주기도 했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딸 때 유의할 점, 식당에서 팁(tip)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할로윈 데이에는 아이에게 무슨 옷을 입혀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이렇게 2년쯤 지나 귀국할 때쯤, 저는 전화 통화를 통해 “왜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조금씩 싹트고 있는 공동체 의식 모여 ‘청소년 행복지수 1위’ 국가 될 수 있기를…

지난해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옆 동에서 한 여중생이 몸을 던졌습니다. 집단따돌림 때문이었습니다. 핏자국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고, 옥상 밑 계단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던 여중생을 보았다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무수한 소문만이 휩쓸고 난 후, 사건은 점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리고 12월 대구의 한 남중생이 학교폭력으로 또다시 목숨을 던졌습니다. 출근길,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저는 가끔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를 생각합니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하고요. 미국 시애틀에서 2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0년 여름, 일곱살짜리 큰딸을 유치원에 보냈습니다. 얼굴색은 똑같은데, 말이 어눌하고 영어를 섞어 쓰는 큰딸은 금방 또래 여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유치원에 간 지 일주일이 되던 무렵, 아이는 잠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가 ‘쟤는 이상하니까 놀지 마’라며 왕 노릇을 하자, 몇몇 친절하던 여학생들도 모두 자기와 친구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상황은 나아졌지만, 놀이터에서 놀 때면 큰딸은 늘 애들이 맡기를 꺼리는 술래역할만 맡았습니다. “나대지 마라!”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심한 욕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왕따나 학교폭력 등의 사건이 반복되어도, 많은 사람은 “왕따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 혹은 “문제아들은 전학이나 퇴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위안을 삼기도 하지요. 공동체가 아닌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이것은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걸 어렵게 합니다. 청소년 문제 취재를 하면서 참 고약했던 건, “어쩔 수 없다. 해결책이 없다”는 패배감이 사회 전체에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다름’을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욕심을 덜어내고 ‘행복한 기자’가 되어보렵니다

목욕탕 때밀이, 이혼전문 변호사, 성인전화방 상담원, 병원영안실 장례지도사(염습사).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씩 제가 직접 체험해본 후 르포 기사를 썼던 직업입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 CEO, 시민단체 대표, 교수, 연예인, 큐레이터, 경찰, 노숙자, 마약중독자…. 기자로 일하며 만나본 직업군입니다. 한국에는 1206개의 직업이 있다고 하는데, 10년가량 기자로 일하며 아마 수백 가지의 직업군을 만나보았을 겁니다. 겉으로 봤을 땐 별볼일 없지만 의외로 보람있고 수입도 좋은 직업도 있었고,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일 자체는 너무 지루하고 성취감이 없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직업마다 나름의 고충과 애환이 있다는 것만이 공통점이겠지요. 일간지 기자라는 직업의 가장 큰 고충은 ‘시간’입니다. 매일 아침 독자의 문 앞에 신문을 갖다놓기 위해, 기자들은 전날 밤을 전쟁 치르듯 보냅니다. 개인적인 약속을 자주 펑크 내고, 가족과의 저녁 한 끼를 하기 힘들지요.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 기자라는 멋진 직업 뒤에 감춰진 그늘입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탈(脫)기자’로 살았습니다. 하루종일 전화 한 통 없네(상실감)→ 그래 잘 그만뒀어. 이제 편하게 살자(자기 위안)→ 음~ 이건 기사로 써도 좋겠네. 지금 기자 했더라면 잘할 텐데(긍정도 부정도 아닌 객관화). 딱 이 시점에 자의 반, 타의 반 기자로 돌아왔습니다. ‘넘치는 게 정보요, 발에 걸리는 게 기자인 이 정보과잉 시대에 나는 왜 숟가락을 하나 더 얹으려는 걸까’ 생각해봤습니다. 신문사 밖 세상을 구경하고 나니, 기자의 정체성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기사 하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초년기자 시절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