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홈 떠나 대학생으로… ‘혜린이의 홀 로서기’ 응원해주세요

어린시절 부모 이혼, 공부 대신 일 시키던 엄마 떠나 중 3때부터 ‘그룹홈’에서 생활’ 나만 힘든 게 아니다…’스스로 다독이며 열심히 공부. 사회복지학 전공해서 저개발국 어린이 돕고 싶지만 대학등록금 생각하면 막막 “헤어진 지 6년 만에 동생이랑 아빠를 만났어요. 동생은 남처럼 어색했고, 아빠는 ‘미안하지만 대학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만 했어요. 등록금 때문에 찾아간 건 아니었는데….” 지난 13일, 전주시 한 그룹홈에서 만난 혜린이(가명·19)는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혜린이의 부모님은 7년 전 이혼했다. 혜린이는 어머니를, 혜린이의 남동생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동생의 안부가 궁금했던 혜린이는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어보고 아버지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재혼한 아버지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고 못살게 굴던 예전의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남동생은 청소년 축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남동생의 10살 때 모습만 기억하고 있던 혜린이는 훌쩍 커버린 동생을 보며 동생을 잘 키워주신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고마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혜린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동생에게 돈이 많이 들어가니 너 대학은 못 보내주겠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버지의 새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혜린이는 그 후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사실 혜린이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남동생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동생이 걱정되어서였다. 어머니가 자신의 고등학교 진학을 막았던 것처럼 아버지 역시 동생의 고등학교 진학을 반대하지는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남동생은 분명 저보다 훨씬 힘들어했을 거고,

“세계에 우리 나눔정신 알리는 봉사자들이 진짜 애국자죠”

정정섭 기아대책 회장 “내가 지난 21년 동안 한 일은 세상 곳곳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국제구호개발 NGO 기아대책의 정정섭(69·사진) 회장이 말했다. 대부분의 NGO가 가장 욕심내는 일이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는 곳곳이 전쟁터이거나 재난이 휩쓸고 간 지역이고, 굶주림과 질병에 고통받는 땅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는 것도 힘든데, 아예 현장에 눌러 살며 그들과 함께 할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1000명을 넘어섰다. 77개국에 보낸 ‘사람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진 셈이다. 1989년 기아대책을 설립한 정정섭 회장은 “후원자 사무실 한편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던 기아대책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뿌듯해했다. 설립 첫해 780명에 불과했던 후원자 수는 2010년 현재 27만8000명을 넘어섰고, 1억8000만원(1989년)에 불과했던 후원금도 올 한 해 1246억원의 사업 예산으로 늘었다. 21년간의 세월 동안 정정섭 회장의 머리도 하얗게 세었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산행에서 늘 1등을 했었지만, 올해는 무릎이 속을 썩인다. ‘신념’ 하나로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뛰는 기아대책 식구들 얘기를 할 때는 눈시울도 붉어졌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빛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2030년까지 10만명의 해외 봉사단원을 파견하는 것이 목표다. ―왜 사람입니까. “모금을 많이 한다고 좋은 NGO는 아닙니다. 사람이 함께 가야 믿을 만하고 확실합니다. 우리 후원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사람들이 돕게 하려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이 가야 대한민국이 돕는다는 걸 여과

“여러분이 읽으면 노숙인들의 절박한 꿈 이룹니다”

잡지 ‘빅이슈’ 판매 르포 전 세계 10개국 발행 수익금 50% 이상 노숙인에게…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금액으로 모두가 웃는 세상 만들 수 있어”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서민들이 제일 많이 이용한다는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신도림역. 1번 출구 앞의 사람들은 칼바람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빅이슈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빅이슈는 지난 7월 창간한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다. 독자가 3000원을 내고 잡지를 사면 1600원이 판매자인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석 달 경력의 ‘빅판(빅이슈 판매자)’인 양정선(50)씨 옆에서 일일 ‘빅돔(빅이슈 판매도우미)’을 체험하는 기자 역시 빅이슈에서 정한 슬로건을 외쳤다. “여러분이 읽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빅이슈입니다.” 그 말을 듣더니 양씨는 껄껄 웃었다. “세상까지는 안 바뀌더라고요.” 양씨는 “1차 목표는 하루에 30부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침 9시부터 시작한 빅이슈 판매는 30분이 지나도록 개시(開始)도 못하고 있었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갔다. “커피 한 잔 드세요.” 양씨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따라줬다. 달달한 커피가 목으로 넘어가니 추위에 바짝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양씨는 커피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빅이슈를 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입니다’라는 말을 안 했어요.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제 입으로 하기 그렇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행인들과 눈을 맞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입니다”라고 크게 외친다. 양 씨는 “빅이슈를 팔면서 사람들이나 사회와 관계를 회복한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양씨의 휴대폰으로

1급 장애인만 ‘도움’이 필요한가요?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서비스 르포 만 6~18세 활동보조지원 月 60시간 이하로 제한 2급 장애부턴 혜택도 못 받아 반짝 추위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던 지난 15일 아침 7시. 서울 동작구 한 아파트입구에서 휠체어를 탄 동준이(가명·16)를 만났다. 동준이는 기자가 하루 동안 ‘활동보조지원서비스’를 하기로 한 뇌병변 1급 장애아다.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서비스란 혼자서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을 수행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보건복지부에서 활동보조인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장애인 가족의 부담을 덜고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기자가 첫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동준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 아침산책을 다녀오던 외할아버지를 본 것이다. 깜짝 놀란 기자에게 동준이 어머니 최희승(가명·42)씨는 “외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작은 뇌를 가지고 태어난 동준이의 지능은 만 1세에서 멈췄다. 좋고 싫음은 구별할 줄 알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아니면 동준이의 의사표현을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했다. 동준이는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집에서 밥을 먹고 씻고 옷을 입는 것은 어머니의 손을 빌린다. 학교에 가고 점심을 먹고 일주일에 한두 번 언어치료와 재활원 마사지를 받는 곳까지 이동하는 일은 활동보조인과 담임교사의 도움을 받는다. 기자는 어머니로부터 동준이의 휠체어를 넘겨받아 부드럽게 밀어보았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길 건너 통학 버스를 기다리는 곳까지 가는 동안, 휠체어는 길 위의 작은 요철에도 들썩거렸고 낮은 턱에도 자꾸 멈춰 섰다. 동준이를 휠체어 채로 통학버스에 태워 학교에 갔다. 동준이는 장애인 특수학교인 한국우진학교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재학 중이다. 4교시를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⑨ 인도 지적장애인 취업센터 연 수간다 수크루타라지

“지적장애인이 어떻게 일하냐고요? 조금 느리지만, 함께라면 가능하죠” 국제우주항공박람회 유치(1993), 국방연구개발기구(DRDO) 컨설턴트, 데칸항공 최고기업연락경영자(Chief Executive Corporate Liaison), 정부 내 정보기술부 프로그램 디렉터. 국방과 정보기술(IT) 분야에서의 화려한 경력과 타이틀, 그 모든 것이 한순간 의미가 없어졌다. IT업계 내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였던 수간다 수크루타라지(Sugandha Sukrutaraj·54)씨가 2000년, ‘스페셜 올림픽(Special Olympics)’을 만난 후의 일이다. ‘스페셜 올림픽’은 지적장애인들의 올림픽으로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여동생, 故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 여사가 시작했다. 선수보다 자원봉사자가 더 많은 ‘특별한’ 올림픽으로 4년마다 개최된다. 그녀는 2000년 12월, 인도 스페셜 올림픽의 이사로 초청됐다. 그렇게 많은 지적장애인을 만난 것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몰랐던 것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했습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셜 올림픽에서 지적장애인들을 만난 지 4년 후인 2004년, 수크루타라지씨는 ‘AMBA CEEIC’라는 지적장애인의 경제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센터를 세웠다. 그 결과 현재 인도 전역에는 AMBA CEEIC 센터가 26곳이 있다. 235명의 청년들이 직업기술을 훈련받고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 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은행, 학교, 공항 등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도 49명이나 된다. 2007년 아쇼카 펠로로 선정되어 지원금도 받았다. “항상 ‘절대로 늦은 때는 없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기업을 설득해 업무계약을 맺는 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진 않더라고요. 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조금 느릴 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진 않거든요. 만약 어떤 일이 어렵다면, 좀 더 쪼개고 나누어서 여러 명이 하면 됩니다. 혼자 해야

“사람 마음 움직이던 광고쟁이, 나눔 팔기 위한 준비였다”

문애란 한국컴패션 ‘상근 봉사자’ “기부 하라고 강요하기보다 인생에 어떤 영향 미치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어필합니다” 항상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팔기 어려운 상품이 ‘나눔’이라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상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게 할 것인지를. 그 고민 끝에 만난 사람이 광고회사 ‘웰컴’의 문애란(56) 전 대표다. 제일기획 공채 1기로 ‘최초’의 여성 카피라이터, 제작팀장, 독립 광고대행사 대표까지 ‘광고계 여성 1호’를 독차지했던 그녀가 이제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의 ‘상근 봉사자(Fulltime Volunteer)’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갖고 싶도록, 더 많이 사고 싶도록 만드는 광고업계에서 더 소박하게 살고 더 많이 나누도록 해야 하는 비영리 부문으로 옮긴 이유가 궁금했다. ―광고 쪽과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늘 새로운 일을 추구하십니까. “새로운 일을 추구한다기보다는 그런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발명가였던 아버지가 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요. 운이 따라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습니다.” ―컴패션에서도 ‘최초’의 상근 봉사자라고 들었습니다. 왜 ‘올인(all in)’을 선택하셨습니까. “거역할 수 없었던 마음의 소리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서정인(48) 한국컴패션 대표와 인연이 되어 필리핀의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전 트립(vision trip)’을 갔습니다. 저는 평생 광고 일을 하며 좋은 호텔, 좋은 경치, 좋은 음식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에 회의가 들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행복해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진리와 봉사·실력과 인성 동시에 융합할 수 있는 인재 키울 것”

숭실대 사회공헌_ 김대근 총장 인터뷰 인도에 리빙워터스쿨 개교… 저소득층에 무료 교육 제공 대학 내 사회봉사 과목 운영… 200여 곳 복지기관서 봉사활동 진행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1861~1941)는 1929년에 쓴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에서 일제 식민 지하의 한국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동방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려운 이웃을 향해 밝은 빛을 비추는 나라가 되고 있다. 타고르는 우리에게 시성(詩聖)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타고르가 문학 못지않게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숭실대 김대근(63·사진) 총장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타고르는 불혹의 나이가 된 1901년에 캘커타 서쪽의 샨티니케탄(평화의 마을)에 학교를 설립했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당대의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의 계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 학교와 마을은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타고르의 교육 철학이 반영된 교육도시로 성장했고, 인도 독립 후에는 유치원부터 국립대학(비스바바라티대학)을 모두 아우르는 인도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샨티니케탄은 이제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재들의 요람이다.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고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연구로 ‘경제학의 테레사 수녀’라고 불리는 아마르티아 센(77)도 이곳에서 배출됐다. 인간과 자유와 평화를 교육하는 샨티니케탄, 이곳에 한국의 대학이 세운 학교가 있다. 숭실대는 올 7월에 샨티니케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진 하누당가의 1500평 대지 위에 교실 4개와 다목적 실험실 2개, 중강당, 운동장과 놀이시설을 구비한 ‘숭실리빙워터스쿨’을 개교했다. 인도의 사립학교들도 부러워할 만한 수준의 시설을 갖춘

“도시인에 지역농산물 알리려 요리사들에게 먼저 소개했죠”

일본 로컬푸드 전도사_나카하라 잇보氏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통해 생산자에게는 소득증대를, 소비자들에게는 신선하고 믿을 수 있는 음식을 주자는 로컬푸드(Local Food) 운동은 일본에서도 활발하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도쿄에서 부는 로컬푸드 바람이 거세다. 그 중심에 있는 ‘도쿄로컬레스토랑’ 프로젝트의 나카하라 잇보(中原一步 33·사진)씨를 만났다. “고향 후쿠오카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19살에 도쿄에 올라왔는데 오징어가 하얀색인 것을 보고 무척 놀랐어요.” 잇보씨가 고향에서 본 오징어는 바다에서 갓 잡아 올려 항상 투명했었다. 잇보씨는 ‘오징어는 하얗다’라고 알고 있는 대도시 사람들에게 투명하고 싱싱한 오징어의 존재를 알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10년 동안 ‘피스보트(Peace Boat)’를 타게 됐다. “세계 평화와 인권 증진, 환경 보호를 전파하는 NGO ‘피스보트’의 배를 타고 다니며 전 세계의 농업과 먹을거리 현장, 국제 분쟁 등을 보고 체험한” 잇보씨는 농업이 외교 무기로 사용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소비자가 있는 도시와 생산자가 있는 지역을 직접 연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잇보씨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 몇 명과 2008년부터 각 지역의 전통요리를 취재하고 음식재료를 알아봤다. 그렇게 얻게 된 싱싱한 재료를 도쿄로 가져와 유명 요리사를 찾아갔다.”도쿄의 요리사는 일본 최고의 요리사들입니다. 지역 특유의 좋은 재료를 이용한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요리사들은 자신이 고른 음식 재료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기에 직접 선택한 재료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잇보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생긴 여러 유명 요리사들과의 친분을

[Cover story] “돈 한줌 쥐여주기보다, 자신의 지역 지켜낼 ‘사람’에 집중”

이성민·김창숙 캄보디아 기아봉사단 요즘이 캄보디아의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라고 했는데,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3시간여를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달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빛 속에 꼼짝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젖고 속은 메슥거렸다.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쭘끼리’군(郡)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쭘끼리’라는 이름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산악지대와 밀림지대가 많은 이곳은 캄보디아에서도 특히 눈물과 상처가 많은 지역이다.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 탓에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살과 내전을 1998년까지 겪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부 군대가이 지역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모든 집이 가족을 잃거나 장애인이 된 식구를 끌어안고 산다. 이 땅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쉼 없이 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기아대책에서 15년 전 캄보디아 기아봉사단으로 파견한 이성민(53)·김창숙(48) 부부다. “당시만 해도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6살·3살의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왔습니다. 긴급구호 활동을 펼치느라 항상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 많이 용감해졌죠, 뭐.” 이성민 씨는 국내에서 긴급구호, 국제개발 활동 자체가 없었던 1989년, 해외 원조를 목적으로 세운 기아대책의 1호 간사이자 긴급구호 활동가다. 대한민국표(表) 1세대 해외 긴급구호 활동가인 셈이다. “그 시절 이 지역은 외부와의 왕래도 거의 없었어요. 먹을 것도 부족한 형편이니

“21세기 富,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기부 관점·권유 방식도 바꿔야 할 때”

폴 쉐비시 보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 21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제기부문화심포지엄 ‘기빙코리아 2010’에서 폴 쉐비시(Paul G. Schervish·65) 교수를 만났다. 폴 교수는 보스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면서 부와 자선 연구센터(Center on Wealth and Philanthropy at Boston College) 소장으로 미국의 고액 기부자들을 오랜 시간 연구해왔다. ‘기부문화,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21세기에는 ‘부’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으며 기부문화도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콧수염을 길러 친근해 보이는 폴 교수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받은 첫인상에 대해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은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서 마치 사람을 칠 것 같았습니다. 서울시내 어디를 가도 커피 전문점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걸까요?” 폴 교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동차와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풍요의 21세기에는 ‘부’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다”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보살피려 하는 쪽으로 인간의 본성이 발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와 국가 전체가 잘사는 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폴 교수는 “부가 늘어날수록 돌봄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고 말했다. 폴 교수는 부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이 시대에 기부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부자가 일방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선을 베풂으로써 기부자의 마음에 생길 수 있는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1만

세계 TOP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⑧ 日 ‘테이블포투’ 창업자 마사히사 고구레

선진국엔 ‘건강식’ 후진국엔 ‘희망식’ 20엔<약 280원>으로 만드는 기적의 식탁 기업·학교 등 330여 기관과 제휴, 현재까지 1억200만엔 모여…르완다·우간다·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54개 학교에 급식 지원 일본 최대 무역회사 중 하나인 미쓰이(Mitsui & Co.). 이곳 구내식당에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점심메뉴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직원들이 하나 둘 구내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다양한 메뉴들 중에서도 유독 ‘테이블포투(Table for two)’ 메뉴에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 유이치 아오키(57) 사회공헌부장은 “2008년 8월부터 테이블포투 메뉴를 시작했다”며 “직원들이 이 메뉴를 선택할 경우, 판매액에서 자동으로 20엔(약 280원)이 기부되고 회사도 20엔을 매칭해 추가 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미쓰이 상사는 테이블포투 메뉴 판매를 통해 약 148만엔(2000만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지난 7월부터는 포인트 카드 제도를 도입해 이 메뉴를 10번 먹으면 무료 음료수를 제공하면서 기부를 독려하고, 회사는 동시에 아프리카 고아원에 추가 기부를 하고 있다. 회사 내에는 테이블포투 서포터즈 모임도 구성돼 있다. 주로 20~30대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모임은 사내 캠페인 활동을 주도한다. 정기적으로 사내 설문조사를 통해 메뉴 개발, 홍보 전략을 짠다. 서포터즈 중 한 명인 히데아키 시미즈(29)씨는 “사회적 책임은 기업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글로벌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참 보람있다”고 말했다. 테이블포투 메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다. 비만으로 고심하는 선진국 사람들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후진국 사람들을 위한 메뉴다. 비타민·무기질

“자폐 자녀, ‘말아톤’처럼 장기 계획 세워야”

김용직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회장 비공식적으로는 4만~5만명, 정식 등록 숫자는 1만4000여명인 자폐성 장애인의 특징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법이나 제도를 요구할 수 없기에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이들을 위한 ‘공식 목소리’를 내는 곳은 2006년 만들어진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유일하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 김용직(55) 회장은 사법연수원 12기 출신의 변호사다. 오랜 판사생활을 접고 2001년 법무법인 KCL의 대표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는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27) 때문이었다. 변호사 활동을 하며 사회복지법인 이사, 서울시장애인재활협회 이사 등을 거쳐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영화 ‘말아톤’이 나온 뒤 자폐와 관련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자폐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높이고 힘을 모으기 위해 자폐 아동 부모 3분의 1, 전문가 3분의 1, 후원자 3분의 1로 구성된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탄생했습니다.”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하는 중점 사업은 ‘자폐사랑캠프’이다. 매년 여름 2박3일 동안 자폐 아동과 가족 등 1000여명이 함께 한다. “차량 지원은 물론이고 그때만큼은 가족들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폐 장애아를 돕는 자원봉사자도 따로 모집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캠프 자원봉사자는 교육도 따로 받아야 한다. “많은 자폐 아동 가족께서 좋아해주셔서 열심히 하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협회 활동 5년차. 김용직 회장은 지역별로 자폐성 장애인만을 위한 센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했다. “자폐성 장애인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해서 종합복지관에 가면 항상 소외되고, 뒷전으로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주인인 센터가 생겨야 합니다.” 김 회장은 그러기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