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실천하는 약사 선덕님씨

‘착한카드’는 나눔의 출발점… “작게나마 도움 된다면 행복”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을 나서니 멀리 남산을 등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보였다. 남산 아래 첫 동네라는 용산 ‘해방촌’의 모습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다시 온 피란민들과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이주민들이 모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 오랫동안 주변 이웃을 돌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10년 넘게 결손가정 아이들과 독거노인을 돕고, 약사였던 경력을 살려 노숙인을 위한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선덕님(56·사진)씨다. 2004년부터는 아예 해방촌성당에서 사회복지 관련된 일을 전부 도맡아서 하고 있다. “1997년 지인이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책을 선물했어요. ‘내 이웃을 버려둘 것인가’라는 그분의 말씀이 무척이나 와 닿았습니다.” 종교가 없던 선씨는 천주교 교리 공부를 시작했고, 이웃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약국을 운영하느라 바빠 시간을 따로 내기는 어려웠다. 그때 운명처럼 뇌지주막이 파열되고 하던 약국을 접어야 했다. 건강은 다시 회복했지만, 그녀는 약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성당에서 하는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몇 년 동안 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을 모시고 찾았던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봉사활동자를 찾는다고 했다. 요셉의원은 주변의 노숙인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료진료를 하는 곳이다. 선씨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의원의 정신에 감동받아 2000년부터 10년 동안 그곳에서 약사로 봉사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나눔 실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부님의 권유로 2001년에는 쪽방촌

“직접 참여하는 문화예술 교육, 사회적 성장 밑거름”

인터뷰_ 어린이문화예술학교 김숙희 대표 국제장애어린이축제는 장애 아동에게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하고, 비장애 아동에게는 ‘장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지난 2003년 시작됐다. 매년 가을 이틀 동안 열리는 이 축제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부모들 사이에 ‘좋은 행사’라는 입소문이 퍼지기까지 행사의 주최 단체인 ‘어린이문화예술학교’의 공이 컸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이 중요한 이유와 그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20일 어린이문화예술학교의 김숙희(58·사진)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문화예술을 통한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운을 뗐다. 예를 들어 연극 수업에서 아이들은 엄마 역할을 하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선생님 연기를 하며 선생님의 입장이 돼본다.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계획했던 이유도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데 ‘직접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극을 비롯한 예술이 아이들의 이해력과 판단력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사회의 공통적인 사고와 가치관도 가르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은 메시지를 담은 문화예술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는 ‘공유사고’가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한 사회의 ‘문화’라는 것이다. 예술교육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나 ‘다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은 나쁘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그것은 한 사회가 공유하는 공유사고이자 문화가 되는 셈이다. 문화예술 교육의 시작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람의 시청각을

복지사 처우 높이고 보조금 격차 낮춰야

충남지역 사회복지사하루 동행 취재 충남 사회복지관 보조금 다른 지역에 비해 낮아 ‘중간관리자’급 인력 부족 5명의 업무 혼자 도맡기도 “제 대학 동기들이 전국에서 사회복지사를 하고 있는데 충남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 급여가 제일 낮더라고요.” 충남지역 A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이길상(가명·28) 사회복지사는 씁쓸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오전 10시, 이씨는 막 사회복지관에서 쓰는 승합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던 참이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지방 사회복지사의 하루’를 체험해보기로 한 기자 역시 차에 올랐다. 승합차는 눈 덮인 논밭 사이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농촌 지역에 위치한 A복지관 주변에는 독거노인과 조손가정이 많이 산다.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세 가정만 방문해도 오전 한나절이 훌쩍 간다. 이씨가 일하는 충남지역 사회복지사들의 급여는 전국에서도 낮은 수준이다. 사회복지사의 급여는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규모에 달려 있는데, 충남지역의 지자체 보조금이 타 지역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복지관협회의 신용규 사무총장은 “현재 충남지역 사회복지관에서 받는 보조금은 서울의 2분의 1도 안 된다”고 말했다. 3년째 동결됐던 서울 지역 사회복지사들의 임금이 올해 8%나 올랐지만 충남지역 사회복지사들에게는 아직 먼 얘기다. 올해로 3년차 사회복지사인 이씨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은 160만원 정도. 세전 연봉으로 따져도 2000만원이 채 안 된다. 그나마 이씨가 있는 복지관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올해 충남지역 다른 사회복지관 가운데는 월급이 연체되거나 삭감된 곳도 몇 군데 있다. 승합차가 논둑길에 멈춰 섰다. 슬레이트 지붕 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달려나왔다. “아이고 선상님. 며칠 전에 모터펌프가 얼어서 갈았슈. 모터값이 22만원에 수리비가 10만원이라 카대. 내

[Cover story] “하루에 한 번씩 착한카드 사용 이게 바로 나눔이죠”

변정수의 ‘착한카드로 실천하는 하루 1가지 착한 일’ 대한민국 국민의 1%가 참여해 매일 커피 한 잔 착한카드 사용하면, 일년에 270억원이 기부되는 효과 “정말 포인트가 다 기부돼요? 신용카드를 정말 많이 쓰는데, 포인트를 써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하도 쓰지 않아서 소멸한 적도 많고요. 그런데 굳이 뭔가 비용이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쉽고 편하게 기부할 수 있다니 너무 좋지 뭐예요. 제가 그래서 인터뷰하겠다고 한 거예요.” ‘착한카드를 발급만 해도 연회비와 포인트가 기부된다’는 설명에 배우 변정수(37)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변씨는 지난 2003년 3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9년째 나눔 활동 중이다. 2년 전부터는 남편 류용운(44)씨와 두 딸 채원(14), 정원(4)과 함께 온 가족이 함께 국내외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온 가족이 함께 나눔 활동을 펼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평소 TV 드라마에서 봐왔던 대로 큰 목소리, 다소 빠른 말투, 시원시원한 성격의 변씨는 나눔 활동도 화끈했다. “6년 전부터 해외봉사를 꾸준히 해왔어요. 그때마다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때로는 정이 들어서, 직접 밥을 해준 적도 있고, 함께 물을 나르기도, 벽돌을 나르기도 했죠. 그러면서 ‘이렇게 한 번 찾아가 도와주는 것 말고 계속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맘(Mom) 프로젝트’를 굿네이버스와 함께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맘(Mom)’은 영어로 ‘엄마(mom)’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말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다 보니, 엄마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조금씩 내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공간·환경 데이터 시각화 시민 인식 변화시키는 ‘소리통’

민세희 한국 최초 테드 펠로우(TED Fellow) 지난달 2011 테드 펠로(TED Fellow)가 발표됐다. 테드 펠로는 공유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퍼뜨리고자 콘퍼런스를 개최하는 비영리 단체 ‘테드(TED)’에서 매년 선발하는 혁신가를 말한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에 각각 20명씩 선발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을 기회를 제공한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나 캠페인 등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자원이나 네트워크를 얻는 셈이다. 이번에 발표된 20명의 펠로 명단에는 당당히 ‘KOREA’ 다섯 글자가 자리잡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랜덤웍스의 대표인 민세희(35)씨가 바로 그 한국인 테드 펠로 1호의 주인공이다. 처음 듣는 이름에 ‘데이터 시각화(data-visualization)’라는 활동 분야도 생소하다. ‘아직 한국에서도 유명하지 않은데 오히려 세계로부터 ‘혁신가’로 인정받은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제가 사실 디자인도 공부하고 유학도 경험했거든요. 어찌 보면 혜택을 누린 사람에 속하는 편인데, 그래서 사회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그녀에게서 혁신가의 모습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MIT 내 센서블 시티(SENSEable City) 연구소에서 도시계획 관련 연구와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었어요. 그중 2009년도에 브라질 재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지역 내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을 품게 됐죠. 지역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인데,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목소리가 제일 중요한 거잖아요. 지역 주민 개개인도 지역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거고요. 그게 출발점이 된 거 같아요. 공간과 환경에 대한 데이터를 시각화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출발점요.” 그렇게 랜덤웍스(randomwalks)라는 미디어 스튜디오를 시작했다. ‘도시,

벽돌·창살까지 문화재로 보는 시선 “관광지 조성 아닌 후대 위한 복원에 힘써야 합니다”

박나래 건축문화재 복원가 인도·터키… 세계 벽지 찾아,폐가·민가 실측자료 제작…구축한 자료 유네스코에 제출 “숭례문이 불타는 장면을 파리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문화재가 훼손되었다고 얘기하지 않아요. 문화재가 아프다고 이야기하죠. 숭례문이 불탈 때 저도 그 말을 이해했습니다.” 지난 1일 잠시 한국에 방문한 박나래(37)씨를 만났다. 나래씨는 1887년에 설립된 이래로 프랑스에 하나뿐인 건축문화유적 복원 전문 교육기관인 에꼴 드 샤이오(Ecole de Chaillot)의 유일한 한국인 졸업생이다. 프랑스에서는 에꼴 드 샤이오를 졸업한 건축가들에게만 프랑스의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공부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건축 문화재 복원을 가르치면서 역사와 도시, 건축 모든 것을 공부하게 합니다. 건축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려면 그 건축이 가지는 건축적인 의미 외에도 그 문화재가 놓인 도시에 대한 분석, 당시의 역사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해서 복원을 한다면 그 복원작업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프랑스에서는 문화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복원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복원하죠. 그래서 아주 안 좋은 상황이 아니면 차라리 복원을 하지 않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자의 말에 나래씨는 한국의 상황을 예로 들었다. “예전에 한 성당의 복원에 대한 자문을 하기 위해 한국에 왔었습니다. 당시 성당 복원을 맡고 있던 분이 얘기했던 건 성당 벽돌이 낡아 보이니 새 벽돌로 교체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벽돌 자체가 당시의 역사적이고 건축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문화재라는 사실을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재

“제게 주신 많은 도움 나중에 꼭 보답할래요”

은진이 이후… 지원·응원 쏟아져 지난달 28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지면에는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어하는 은진(가명·16)이의 이야기가 실렸다. 은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가야금 병창을 배운 지 1년4개월 만에 도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올 3월에는 광주예술고등학교 국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할 예정이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공연이나 대회 때 입을 한복이 없어 매번 친구에게 옷을 빌려 입고 있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돌려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탠 적도 있다. 이런 힘든 상황에도 은진이는 씩씩하다.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공연을 하고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은진이의 꿈이다. 기사가 나간 후 은진이에게 학비를 지원하거나, 공연용 한복을 지원하겠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2002년 정년퇴직한 이상봉(71)씨는 은진이를 위해 100만원을 선뜻 내고는 “나도 연금을 타서 사는지라 생활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앞으로 은진이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꾸준히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독자도 은진이에게 50만원을 보내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학생이 대견해서 후원을 하게 되었다”라며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꼭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한복집을 운영한다는 한 후원자는 공연용 한복을 지어주겠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방학을 맞아 집에서 가야금 병창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은진이는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모인 돈으로는 공연용 한복과 음악 기초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전자피아노를 살 예정이다. 은진이는 “많은 분들께 받은 도움을 꼭

[Cover story] 세계 Top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⑩ ‘하갈(Hagar)’ 설립자 피에르 타미

“머리 아닌 가슴으로 운영”… 거리의 아이들을 ‘꿈꾸는 아이’로 미소년 소팟(Sophat)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부엌이다. 채소를 다듬고 잘게 써는 일부터 고기를 알맞게 구워내는 일까지 다 그의 몫이다. 소팟과 함께 일하는 다른 요리사들은 “요리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태도도 너무 좋은 친구”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소팟은 “너무 행복하다”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거리의 아이로 자랐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쓰레기를 뒤지며 간신히 굶어 죽지 않는 삶을 살았죠.” 꿈꾸는 일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07년 ‘하갈(Hagar)’을 만난 이후다. ‘하갈’은 아동 성매매, 가정폭력 등으로 상처 입고 버려진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다. 직업훈련, 사회훈련을 위해 출장요리 업체 ‘하갈 케이터링’ 같은 사회적 기업도 운영한다. ‘하갈’은 당시 소팟에게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거리의 아이였던 소팟에게는, 재료를 다듬는 즐거움도, 음식을 만드는 흥분도, 손님이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닦는 보람도 다 처음이었다. 직업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팟은 현재 다른 레스토랑에서 정식 요리사로 일한다. 프놈펜에 위치한 ‘하갈’은 이처럼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정에서 버림받은, 또는 상처를 받은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다. 집에 감금되어 남편에게 매일 폭행을 당하다 구출된 젊은 여성, 가난 때문에 고작 300달러에 팔려가 아동 성매매에 수년간 희생되다 탈출한 소녀 등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하갈’을 찾는다. 지난 15년간

“빈곤의 근본적 해결은 일자리로 자활 돕는 것”

양옥경 한국사회복지학회장 韓복지예산, 전체 10% 못 미쳐…아직은 “선택적 복지”가 대안, ‘사회적 기업’ 일자리 늘리고 가족형 복지체계 마련해야… 요즘 정치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지’이다. 이 키워드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다음 정권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민주당은 4대강 예산으로 인해 “복지가 실종됐다”고 비판하고 있고, 정부는 “예전보다 복지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전 대표 또한 ‘한국형 복지’를 주창하며 이 논쟁에 불을 붙였다. 2010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한국사회복지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여대 양옥경(51·사진) 교수를 만나 우리나라 복지의 나아갈 길에 대해 물었다. 한국사회복지학회가 주최한 올 추계 학술대회의 주제도 ‘사회복지, 빈곤을 재조명하다’였다. 편집자 주 ―빈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과거엔 ‘빈곤’이라고 하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빈곤층은 일하는 빈곤층입니다. 이를 ‘신빈곤층’이라고 하지요. 일하는 데도 계속 가난에 머무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 빈곤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예전보다 우리나라가 굉장히 잘살게 되고, 특히 부유층은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빈곤층은 더 늘어났지요. 과거에 중산층으로 분류되던 사람들까지 빈곤층으로 떨어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자활이 중요합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장애인이건 노인이건 가난에서 빠져나오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소액대출이나 희망키움 통장 같은 것도 중요한 정책이겠지만, 결국은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통해서 이러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정부에서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착한가족’ 인터뷰

쓸 줄 몰라 소멸됐던 포인트 “기부한다니 정말 좋네요” 나눔은 내 삶의 일부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착한카드’ 캠페인이 첫 출발을 알린 지 오늘로 2주가 됐다. 그동안 전국의 독자들이 착한카드 캠페인 홈페이지(good.chosun.com)를 통해 속속 동참해왔다. 조선일보 공익 섹션 ‘더나은미래’는 착한카드 캠페인에 참여하는 고마운 독자들을 ‘착한가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착한가족은 생활 속에서 매일 기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착한카드를 쓸 때마다 포인트가 기부되니, 차를 마셔도 밥을 먹어도 영화를 봐도 기부를 하게 된다. 착한카드 캠페인이 시작되자마자 기꺼이 착한가족이 되어준 두 명의 독자를 만났다. 편집자 주 ◆최철순씨(66세) “따르릉, 따르릉.” 착한카드 캠페인 시작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 지난 14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착한카드를 신청하려고 하는데 인터넷으로 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최철순(66)씨는 기자의 안내를 받아 착한카드 신청을 마치고 착한가족이 됐다. “신문을 보자마자 ‘아, 참 좋은 캠페인이다’ 싶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카드 포인트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겠지만, 저처럼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카드 포인트를 그대로 썩히게 마련이거든요. 어차피 소멸될 포인트로 기부를 할 수 있다니 좋은 아이디어구나 싶어 얼른 신청했지요.” 최씨는 최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 유용 사건이 터지면서 기부를 하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고 말했다. 자신이 낸 기부금이 투명하게 전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착한카드 캠페인은 “조선일보가 한다니까” 일단 신뢰가 갔다고 했다. 언론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정직하게 기부금을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동안에는 명절

혜린이 보도 후… 쏟아지는후원 손길

지난 14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지면에는 그룹홈을 떠나 대학생활을 준비하는 혜린(가명·19)이의 이야기가 실렸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한 혜린이는 어머니를 따라간 후 공부 대신 어머니의 일을 도와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집을 나와 아동을 보호·양육하는 그룹홈 생활을 시작했고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3년간 장학금을 주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착실하게 대학입시를 준비해왔다. 기사가 나간 후 혜린이를 돕고 있는 굿네이버스에는 혜린이의 등록금과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후원자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지난 21일 기준으로 혜린이에게 전달될 통장에는 이미 420만원이 모였다. 이와 별도로 혜린이의 대학 4년 등록금을 전액 후원하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었다. 등록금 전액 후원 의사를 밝힌 김성주(65)씨는 “은퇴 후 사회복지재단을 만들 계획인데,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살고 있는 혜린이가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 대견했다”며 “앞으로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50만원을 보낸 한 후원자(46)도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혜린이를 보니 ‘이 아이는 조금만 도우면 열심히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굿네이버스 담당자에게 “힘든 일도 있겠지만 열심히 살아달라는 말을 혜린이에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모인 지원금은 만 18세가 되면 그룹홈을 나와야 하는 혜린이의 자립비용과 대학등록금으로 쓰인다. 후원 소식을 들은 혜린이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후원해주신다니 어리둥절하면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혜린이는 현재 전북지역에 있는 대학의 간호학과와 사회복지학과 정시모집에 지원한 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을 마치면 세계를 돌아다니며

[Cover story]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꿈꾸는 소녀 은진이

“생활비 때문에 전단 돌리지만 괜찮아요, 제겐 꿈이 있으니까요” 굳세어라, 은진아 가야금 열두 줄 위로 오른손이 춤을 췄다. 왼손은 천천히 현을 짚었다. 구성진 가야금 가락에 맞춰 열다섯 소녀 은진(가명)이는 가야금병창곡 ‘고고천변’을 불렀다. ‘고고천변’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곡 중 하나로, 자라가 용왕의 약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나왔을 때 처음 본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곡이다. 맺고, 풀고, 꺾는 판소리 가락 속에 은진이는 어느새 자라가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뭍에 오른 자라처럼 목소리에 어떤 경이로움이 묻어났다. “무대가 너무 좋아요. ‘우리 것’인 전통 음악과 한복도 좋고요.” 은진이는 잇달아 네 곡을 부르고서야 무대에서 내려왔다. 숨이 차오를 법도 하건만,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은진이가 ‘가야금병창’을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후교실’에서였다. 일주일에 두 번 1시간씩 배우는 게 전부였지만 처음부터 가야금병창에 푹 빠져들었다. 소질도 빼어나 1년 4개월 만에 전남도지회 주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개인 일등을 차지했다. “대회에서 입상한 후에 가야금병창을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는 내내 ‘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당시 어려운 집안형편을 몰랐던 은진이는 ‘레슨받고 싶다’며 엄마를 졸랐다. 은진이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부모님에게 “은진이는 정말 소질이 있다”며 “레슨비를 조금만 받아도 좋으니 꼭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은진이는 결국 1시간에 5만원을 내고 다른 친구들보다 저렴하게 개인 레슨을 받게 됐다.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분식집에 들러 수다를 떨며 놀 때 은진이는 밥도 거르며 연습을 했다. 개인 레슨에서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