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학대 당해도 변호사 만날 수 없는 아이들, 사법접근권 보장돼야”

“학교폭력 사건 조정 절차 중에 아이들을 판사인 제가 직접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자기 사건이 법원에 계류 중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모도, 대리인인 변호사도 당사자에게 소송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겁니다. 심지어 가해아동이 직접 쓴 사과문도 피해아동에게 전달되지 않았어요. 1년4개월 만에 제가 처음 읽어줬습니다. 피해아동은 그 자리에서 ‘이제 다 됐다’면서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한 번이라도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어봤다면 ‘잘못한 것을 사과하고, 받아주고, 다시 사이좋게 놀고 싶다’는 마음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이처럼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인 아이들이 배제된 사례가 많습니다.”(임수희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판사)

우리나라 아동의 권리는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법률 시스템은 아동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있을까. 18일 서울 영등포구 켄싱턴호텔에서 ‘아동의 사법접근권보장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두루와 국회 여성·아동인권포럼, 국가인권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삼성생명 후원으로 마련됐다.

18일 서울 영등포구 켄싱턴호텔에서 ‘아동의 사법접근권보장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단법인 두루
18일 서울 영등포구 켄싱턴호텔에서 ‘아동의 사법접근권보장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단법인 두루

이날 심포지엄에 참가한 법조인들은 학대 피해 아동이 보호자 동의 없이는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점, 관련 기관에서도 법적 조력을 받기 어렵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어 아동에 대한 지원이 복지의 차원을 넘어 권리 보장으로 나아갈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아동학대, 국가에 책임 묻는다

권인숙 국회 여성아동인권포럼 대표(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개회사에서 “아이들이 겪는 무수한 폭력과 학대를 알면서도, 사회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 지원체계에서도 변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며 “대안을 찾아나가면서 아동의 사법접근권 보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마한얼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법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아동의 현실을 지적했다. 마 변호사는 “아동은 피해를 당하더라도 법정대리인 동의가 없으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다”면서 “부모가 가해자라거나 피해 상황에 관심이 없는 경우, 또 가해자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소송을 포기하면 아동 의사와 관계없이 변호사 선임이 불가능해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마 변호사는 ‘온 마을 Law’ 사업의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온 마을 law’는 사단법인 두루가 아동·청소년 인권옹호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진행하는 법률지원사업이다. 지난해 6월부터 이번 달까지 47명의 변호사가 아동·청소년의 법적 권리 향상을 위한 소송, 상담, 행정 절차 지원활동 등을 펼쳤다.

황준협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온 마을 Law’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달 시작한 ‘아동학대 국가배상청구소송 대리인단’ 사례를 소개했다. 아동학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내 첫 소송이다. 황 변호사는 “약 20년 전 아동학대 신고를 두 차례나 했지만 당시 적극적인 조사나 분리 조치 등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며 “국가 대상 소송을 통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아동 보호 시스템을 짚어보고 실무 관행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 대상자’에서 ‘권리 주체’로

임성택 사단법인 두루 이사(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는 아동·청소년 인권옹호 생태계 조성의 필요성에 대해 발표했다. 임 이사는 “당장 먹을 빵과 잠잘 집도 중요하지만, 아동의 권리를 보장받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공익법 생태계 조성과도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공익기금이나 기업의 사회공헌 기금이 아동의 복지 지원에 치중돼 아동권리옹호 활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점도 지적됐다. 지난 2021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배분금 7104억원 가운데 아동·청소년 대상 배분 금액은 1740억원이었다. 대부분은 교육, 생활지원 등 복지 지원으로 쓰였다. 임 이사는 “국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전담 변호사가 없지만, 일본은 2016년부터 우리나라 아동보호전문기관 격인 ‘아동상담소’에 의무적으로 변호사 배치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경우, 전국 940개의 ‘아동옹호센터’에서 피해자 옹호, 법적인 대응, 신체·정신건강 전문가가 한 팀을 이뤄 사건을 처리한다”고 말했다.

키아라 알타핀 국제인권캠퍼스 박사는 아동인권 기획소송 사례와 진행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 등을 제언했다. 아동인권 기획소송은 아동의 인권을 위한 법적, 사회적 변화를 만들기 위한 소송이다. 알타핀 박사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아동인권 기획소송은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이어 “기획소송이 아동 인권을 증진하는 법적·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소송을 수행하는 과정이 아동인권에 반한다면 소송의 당위성과 역량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권리와 관련된 법체계를 짚었다. 다만 김 교수는 “법과 제도는 우리 사회가 아동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인 장치일 뿐, 그 자체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과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주요하게 고려했던 목표 실현 여부, 실현된 정도가 주요한 평가 지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은 소라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부센터장이 좌장을 맡아 진행했다. 임수희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판사는 “아동이 관련된 재판에서는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실제로 재판을 다루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 부모까지 아동을 배제한 채 모든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며 “근본적으로 사법 시스템 안에서 아동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민감하게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지 짚어가면서 공익법 생태계를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희 국가인권위원회 아동청소년인권과장은 “우리나라가 유엔아동권리협약 당사국이 된 지 30년이 넘어갔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헌법에는 아동이 권리의 주체이기 보다는 국가가 시행하는 복지정책 대상자이거나, 보호자·가족에 귀속된 구성원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아동권리옹호 생태계에서 인권위도 여러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아동권리에 대한 탄탄한 근거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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