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일(일)

협회 “사회공헌에 돈 내라” vs 기업 “뭘 믿고? 회사서 한다”

사회공헌기금 신경전
정유·카드 등 업종별 연합회 최대 1조5000억 기금 조성
대규모 공헌 홍보했지만 기업의 참여율은 저조해
2012년, 대한건설협회 담합문제로 이미지 쇄신하려
기금 100억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모인 건 15억원
기업 “계획·시스템 없는 협회의 일방적 요구” 협회 “전문인력 보강 컨설팅 받는 등 노력 중”

미상_그래픽_사회공헌_줄다리기_2014

“회원사가 함께 모여 사회공헌을 하자고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있다. 기업들이 각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사회공헌을 하기보다, 함께 협력해야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C협회 관계자)

“불필요한 중복이다. 이미 회사 차원에서 대규모로 사회공헌을 진행하고 있는데, 협회에서 별도로 사회공헌기금을 내라고 하니 난감하다. 오히려 협회에 낸 기금이 일시 후원에 그치는 등 ‘보여주기식’인 경우가 많다.”(S기업 CSR 담당자)

업종별 주요 기업들이 모은 사회공헌기금을 둘러싸고, 협회와 개별 기업 간의 신경전이 팽팽하다. 기업들은 경기 악화를 이유로 기부를 꺼리고, 기금을 조성하는 협회들은 약속한 금액을 채우지 못해 속이 탄다. 인력·역량 부족으로 사회공헌기금을 사용하지 못한 채 일부 쌓아두는 사례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마련한 사회공헌기금이 업계의 도마 위에 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유행처럼 번진 업종별 사회공헌기금…기업들은 “괴롭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유·카드·은행·손해보험·LPG 등 업종별로 사회공헌 기금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최소 10억원에서 최대 1조5000억원까지, 그 규모도 상당하다.

생명보험사들은 2007년부터 2026년까지 총 1조5000억원의 사회공헌재원을 출연키로 합의하고(매년 세무상 이익의 0.25~1.5%를 기부), 지난 6년간 의료·복지 사각 지원에 1673억원을 투입했다. 2008년 에너지 소외계층을 위해 1000억원을 조성하기로 발표한 대한석유협회는 정유 4사로부터 4년간 784억원을 모았다. 타 업종 기업들의 기금 조성 발표도 2011년을 기점으로 줄을 이었다. 여신금융협회는 2011년 7개 카드사로부터 매년 200억원을 모아 대규모 사회공헌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했고, 손해보험협회 역시 18개 회원사로부터 200억원 기금을 마련해 소방공무원 유자녀 지원사업,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사업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후 대한건설협회(최대 100억원), 은행연합회(200억원), 대한LPG협회(150억원), 도시가스협회(100억원)도 사회공헌기금 조성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협회를 중심으로 한 기금 조성 및 사회공헌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2012년 대한건설협회는 담합·부실시공 문제로 추락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연말까지 30억, 중장기 사회공헌기금으로 100억원을 조성키로 발표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인 금액은 약 15억원에 불과하다.

대형 건설회사 CSR 담당자는 “사전에 건설회사들에 취지 설명이나 기금 조성 요청도 없이 일방적으로 언론에 100억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고, 이후 공문을 뿌려 참여 기업을 모집하는 특이한 형태로 진행됐다”면서 “대부분의 건설사가 ‘체계적인 계획이나 시스템도 없는 협회의 일방적인 요구 때문에 이미 진행하고 있는 사회공헌 정책 기조를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그러자 이듬해 협회는 각 건설회사의 사회공헌 사업을 한데 모아 마치 협회 차원에서 진행된 것처럼 보도하더라”고 설명했다.

2012년 사회공헌기금 200억원을 조성하기로 한 은행연합회의 계획은 2개월 만에 무산됐다. 각 은행이 연합회에 기금을 전달하면, 40%에 달하는 증여세를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은행연합회는 20개 금융기관으로부터 2500억원을 출연받아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을 2012년 설립, 3년간 총 5000억원을 모아 청년 창업 보증·교육·공간 지원을 지속할 계획이다. 은행권의 한 사회공헌 담당자는 “재단 출연 기금 때문에 회사 차원의 사회공헌 예산이 줄어든다”면서 “업계에선 시도때도없는 ‘수금(收金)’ 때문에 사회공헌 예산과 별도의 비용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귀띔했다.

◇기금 모으기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진정한 협력 모델 나와야

기금을 조성·집행하는 협회 역시 애로사항이 많다. 지난 2011년 “매년 200억원을 모아 대규모 사회공헌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여신금융협회는 이듬해부터 7개 카드사로부터 기금을 모으지 못했다. 카드사들이 출연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

A카드사 CSR 담당자는 “초반엔 금융소외계층, 소상공인 지원하라는 정부 압박으로 시작됐는데, 막상 기금이 마련되니 협회가 원하는 사업을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진행하더라”면서 “협회에 사회공헌을 직접 기획·실행할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사업의 전문성과 완성도가 떨어졌는데, 앞으로 사업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추가로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1년 모인 200억원 중에서 협회가 지난 3년간 집행한 금액은 146억원에 불과하다.

이에 여신금융협회에서는 사회공헌 인력을 보강하고, 올해 1월까지 3개월에 걸쳐 사회공헌기금 운영 컨설팅을 받았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매년 소멸되는 카드 포인트만 1000억원대에 달하는데, 의미 있는 사회공헌을 할 수 있도록 협회와 카드사가 함께 협력하길 바란다”고 답했다.

경영 환경 악화도 변수다. 2008년 정유 4사로부터 1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기로 발표했던 대한석유협회는 2009년 유가 하락으로 2011년까지 3년간 모은 금액이 301억원에 불과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실적 대비 기부 비율을 정해 지금까지 784억원을 모았는데, 올해도 정유사가 적자를 보고 있어서 출연 기금을 다시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한 정유회사 담당자는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매출의 일정 금액을 매년 출연해야 하니 부담스럽다”면서 “이에 사회공헌팀과 별도로 정부 시책에 대응하는 팀에서 사회공헌 예산과 별도로 비용을 마련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태형 사회공헌정보센터 소장은 “기금에서 인건비·운영비를 따로 책정해서라도 협회 내부에 CSR 전문 인력을 보강해야만 효과적인 사회공헌이 가능하다”면서 “회원사로부터 모인 기금을 협회가 개별 기업의 특성에 맞춰 사회공헌을 진행하기 어려우니,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돌보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를 찾아 집행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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