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한 명 치료하는 의료 봉사… 한 나라 고치는 인재 양성으로

보건 의료 ODA 진화
국내 의료기술 발전으로 수술받는 외국 환자 많아
몽골의 의료 연수생들 국내 병원에서 배움받아 자국 환자들 고치고 싶어
연수받은 콩고 치과 의사한국 의료 시설에 감명 장비·시설 갖춘 병원 지어
의료 발전 더딘 빈곤 국무료 진료 지원도 한계 직접 환자 돌볼 수 있도록

“현재 몽골에는 선천성심장병을 앓는 아이가 굉장히 많아요. 수술을 해주려면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어요. 하지만 제가 선천성 심장질환 전문가가 되면 그 아이들을 절대 외국으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연세대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이하 연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병원 2층 소아심초음파실. 칼리우나(26·몽골샤스틴병원)씨는 이곳을 거쳐가는 환자들의 초음파 영상을 빠짐없이 챙겨본다. 영상에 따라 달라지는 진단법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다.

①칼리우나씨(오른쪽)가 정조원 교수와 함께 소아심장병 환자의 초음파 영상을 보고 있다. ②한국에서 연수를 마친 의사들이 근무하고 있는 스리랑카 아비사웰라 응급의료 센터의 모습. /연대세브란스병원·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①칼리우나씨(오른쪽)가 정조원 교수와 함께 소아심장병 환자의 초음파 영상을 보고 있다. ②한국에서 연수를 마친 의사들이 근무하고 있는 스리랑카 아비사웰라 응급의료 센터의 모습. /연대세브란스병원·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제공

같은 시각, 5층 제3수술실에서는 생후 1년 4개월 된 아기의 수술이 한창이다. 9㎏에 불과한 소아의 가슴을 열고, 심장 내부의 기형을 교정해 주는 수술이다. 바트바타르(30·몽골샤스틴병원)씨는 이미 몇 차례 비슷한 수술을 참관한 경험이 있다. 참관이긴 하지만, 전 과정을 반복적으로 지켜보면서 절차와 방법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수술을 마친 환아들은 4층 집중치료실(HICU)로 옮겨진다. 사후 관리에 들어가는 곳이다. 전날 인공판막수술을 마친 아기를 우란베르(29·몽골샤스틴병원)씨가 돌보고 있다. 아기의 상태가 표시되는 모니터 옆을 지켜서서, 혈액이나 수액의 양을 조정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몽골에서 온 의료 연수생들이다. 올 초까지 몽골 샤스틴 중앙병원에서 근무하다 지난 3월 한국을 찾았다. 한국심장재단이 진행하는 ‘개발도상국 의료진 연수지원사업’을 통해서다. 이들을 포함, 운다르마(32·인공심폐기사)씨와 데미오드(32·마취과)씨 등 5명이 한팀이다. 한국심장재단은 지난 2008년부터 낙후된 의료 환경에 처한 국가의 의료진을 초청, 1년간 의료 연수를 시켜주고 있다. 올해는 연대 세브란스병원과 삼성서울병원에서 각각 5명씩 맡아 교육하고 있다.

몽골에서 4년간 외과 수술의로 활동했던 바트바타르씨는 “몽골은 소아 쪽 전문 의료진이 따로 없다”며 “특히 7㎏ 미만의 선천성심장병 환자는 수술이 불가능한데, 한국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그런 수술을 몽골에서도 하고 싶다”고 했다.

◇’고쳐주기보단 스스로 고칠 수 있게’, 보건의료 ODA의 진화

빈곤한 나라일수록 의료 분야의 발전은 더디다. 보건의료 인력 자체가 부족하고, 인력을 교육할 여건도 마땅치 않다. 정경희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대외협력부장은 “일반인들이 간호사 역할을 하고, 우리나라 의대생 수준에도 못 미치는 의사들이 수술하는 국가도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건의료 분야가 전체 ODA(공적개발원조)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무료 진료봉사의 형태로 보건의료 분야 해외원조가 시작됐다. 자국에서 치료받을 수 없는 환자를 국내로 데려와 치료해주기도 했다. 박영환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심장혈관외과)는 “지난 2008년, 의학 100주년을 맞아 조사해보니 연간 40여개 병원에서 100여명의 외국인 환자를 수술했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다. 박영환 교수는 “한 번씩 아이들을 데려와서 병을 고쳐주는 것은 뿌듯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선택받지 못한) 훨씬 더 많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에 병원을 지어도 숙련된 의료 인력이 없어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후 의료 ODA는 ‘현지 인력양성’으로 진화하고 있다. ‘현지 인력을 훈련해 그들이 직접 자국의 환자들을 돌보게 하자’는 움직임이 대두한 것이다. 대학병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서원석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사무총장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대학 평가에 사회 공헌이 반영되면서 대학병원에서도 ‘봉사하는 의사’를 길러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겼다”며 “저개발국가의 의사들을 연수시키는 활동이 활발해졌고, 최근에는 지방의 병원에도 연수 프로그램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일반화됐다”고 덧붙였다.

◇한국 연수 3개월을 계기로 콩고에 병원 신축한 치과의사

“중앙아프리카 쪽에 제품을 판매해 본 경험은 있으세요?”

지난 8일,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에 위치한 디지털 의료기기 전문업체 ㈜씨텍메디컬에서 색다른 흥정이 있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의 치과의사 팬(50)씨가 국내 의료기기 업체들을 순회하고 있었다. 팬씨는 6개월 후 콩고 현지에 최신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열 예정으로, 동료 의사 무손젤라(62)씨와 함께 국내에 들어와 치과 진료 장비·환자 진료 모니터·방사능 엑스레이 장비 등 20여 곳의 첨단 의료기기 업체를 둘러봤다.

팬씨는 2010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종욱 펠로우십'(개발도상국 보건의료 인력 연수사업)으로 서울대 치과병원 치주과에서 연수를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간 후, 병원과 대학 등을 돌며 한국에서 배운 선진 기술을 전수하는 노력을 이어왔고, 이 노력이 병원 신축까지 이어졌다.

“연수 3개월 동안 한국의 의료 기술과 최신 시설에 감명을 받았어요. 연수를 마치고 원래 일하던 병원으로 돌아왔는데, 배운 기술을 활용할 환경이 안 돼 안타까웠어요. 그러던 차에 동료들과 ‘우리도 그런 병원을 만들어 보자’는 뜻을 모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후원자도 나타났고요.”

팬씨가 4명의 동업 의사와 함께 킨샤샤에 짓게 될 병원은 약 900평 규모로 치과, 방사선과, 내과, 응급의학과 등 4개 과로 구성될 예정이다. 팬씨와 동료들은 이 병원이 콩고 의료 분야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팬씨는 “한국에서의 배움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며 “콩고 의료계 전반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기술 전수 너머에 있는 것

저개발국의 의료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의료 기술만 전수하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저개발국 의사들의 경우, 해외에서 고급 교육을 이수한 후 해외에 머무르는 경우가 더 많다. 자국 환경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술의 진화’가 아닌 ‘사람의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경희 한국국제의료재단 협력지원부장은 “우리는 국가발전의 동력이 되라는 차원에서 교육을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이력서에 한 줄’ 정도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며 “연수 프로그램에 ‘이런 교육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교육을 많이 포함한다”고 했다.

서원석 사무총장은 “콩고 의사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을 두고 한국을 다시 찾은 걸 보면,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인의 공감 어린 위로와 배려가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라며 “지식도 중요하고,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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