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과 거래하는 사회적기업의 사정
작년 공공기관의 사회적기업 제품 구매율 0.68%
기업이 직접 공공기관 찾아가도 형식적인 대응만…
구매담당 공무원에 인센티브·의무교육 강화해야
‘0.68%’.
지난 한 해 국가기관, 지자체,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서 사회적기업 제품을 구매한 비율이다. 지난달 1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3년 공공기관의 사회적 기업 제품 구매 실적’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총구매액은 2632억원으로 지난 2012년(1916억원)보다 37.3% 증가했지만 여전히 공공기관 경영평가 권고 기준(3%)을 크게 밑돈다. 대부분의 사회적기업에 판로 개척이 케케묵은 난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공기관들의 더욱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이에 ‘더나은미래’는 지난해 공공기관과 거래 실적이 있는 사회적기업들에게 공공거래에 대한 ‘속내’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문 닫기 일보 직전에 살아났죠.”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정립전자. 중증 장애인 160명이 일하는 사회적기업으로, ‘LED(Light Emitting Diode·발광다이오드)’ 등 전기·전자 제품을 생산한다. 2008년 경영이 악화돼 폐업 위기에 놓였지만, 현재는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 작년 매출은 약 230억원. 2009년과 비교하면 10배가 넘는다. 정립전자는 공기업들의 도움을 발판으로 올라섰다. 김현국 정립전자 대표는 “한국남부발전이 제품 개발비를 지원했고, 다른 발전사들도 꾸준히 제품을 구매해줘 경영에 안정성을 얻었다”고 했다. 사회적기업 중 유일하게 자사 브랜드 PC를 납품하는 ‘레드스톤 시스템’은 작년 매출 78억 중 90% 정도가 공공기관과의 거래 실적이다. 박치영 레드스톤 시스템 대표는 “지자체, 관공서, 공기업들을 찾아 전국을 돌며 얻어낸 성과”라며 “민간 시장을 뚫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보고, 회사 설립 단계부터 공공기관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는 작년 11월, 서울시로부터 서울 중랑구의 ‘시립중랑노인전문요양’을 위탁받았다. 사회적기업이 사회복지시설의 위탁 운영을 맡은 첫 번째 사례. 민동세 도우누리 이사장은 “복지시설 위탁도 엄연히 공공 구매의 한 영역인데,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며 “우리를 신호로 사회 서비스 영역의 판로가 확산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회적 경제 조직들에게 공공 시장은 생존과 직결된다. 컴퓨터 부품업체를 운영하는 한 사회적기업가는 “민간 시장에선 신뢰는커녕, 관심 자체가 없다”며 “개성공단 등에서 대량생산되는 제품들과 비교해 가격 경쟁력이 워낙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적기업들의 이목이 공공 시장에 고정된 이유다. 송기호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시장조성지원단장은 “취약 계층의 고용이나 사회 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공공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비즈니스 논리를 이용해 풀어주는 파트너”라며 “‘함께 간다’는 인식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갈 길이 멀다. ‘이해 부족’이 첫손에 꼽힌다. 전남 여수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송정인더스트리의 이정숙 과장은 “월평균 15곳 이상의 공공기관을 찾아가 구매를 제안하는데, 모법인(사회복지법인 동행)과 우리 기업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며 “힘들게 찾아갔는데 상법만 따지다가 허탕 치고 돌아오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정부 권고 사항을 지키느라 형식적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취약 계층의 자립이 결국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복지법인 가나안복지재단 가나안근로복지관의 백승완 관장은 “우린 중증 장애인 40여명과 재생 카트리지를 만드는데, 공기관에 설명하러 가면 ‘사회적기업이 그런 것도 만드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라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200가지의 카트리지를 대기업 수준으로 생산한다고 강조해도 쉽사리 신뢰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송기호 단장은 “공기업들이 구매하는 사회적기업 제품은 종이, 면장갑 등 단순 생산품이 대부분인데, 실상은 교육, 문화예술, IT, 용역 서비스 등을 다루는 사회적기업의 비중이 60% 이상으로 더 높다”며 “인식 부족이 수요와 공급에 비대칭 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쇄·출판 사회적기업의 한 관계자는 “복사용지를 만드는 사회적기업과의 (공공) 거래는 활발한데, 그 복사지로 인쇄물을 만드는 우리 같은 기업과의 거래는 굉장히 미미한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굳건한 판로’라는 인식과 달리, 공공거래 안정성에 대한 아쉬움도 제기됐다. 에너지 관련 공기업과 3년째 거래를 이어오던 사회적기업 ‘서울오케스트라’는 이번 달 거래 종료 통지를 받았다. 이재준 서울오케스트라 경영지원팀장은 “공기업과의 거래로 매출이 20% 정도 올라 직원도 10명 늘었다”며 “공기업과 거래가 끝난다는 건 그 매출이 한 번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경북 영천에서 국수 제조업을 하는 사회적기업 ‘풀내음’의 황동희 대리는 “행사나 회의가 있을 때 공공기관에서 단체로 구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의 일회성으로 끝나 판로 확장 효과가 없다”고 했다. 익명의 사회적기업가는 “정부에서 공기관이 부채 탕감하고 경영 효율화하라고 나서면서, 거래량이 20% 넘게 줄었다”며 “이 부담은 고스란히 제품을 만들던 소외 계층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다 적극적인 제도와 다양한 인센티브 전략을 균형 있게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기호 단장은 “현재 사회적기업 육성법이나 지자체 조례 등은 사회적 구매에 대한 권고 수준에 그치는데 조금 더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며 “구매 담당 공무원들의 인센티브나 의무 교육 등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동세 이사장은 “현재 국가 서비스의 두 축인 바우처와 노인장기요양은 모두 민간에 개방돼 있는 형태”라며 “공공 구매가 활성화되려면 이런 사회 서비스 영역부터 보호막을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