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토)

정부, ‘시민사회 활성화’한다더니 4년째 제자리걸음

표류 중인 ‘시민사회 3법’

‘시민사회 성장 기반 마련.’ 문재인 정부가 출범 당시 내세운 100대 국정 과제 중 여섯째 공약이다. 2017년 정부는 시민사회 활성화를 목표로 ‘시민사회발전기본법’을 제정하고, 민주시민 교육 확대, 기부 문화 활성화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임기 4년이 넘도록 기본법 통과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법안은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고 공익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실질 지원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게 골자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자동 폐기됐고, 이번 21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민주시민교육지원법은 15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매번 발의된 법안이다. 그러나 제대로 논의된 적 없이 모두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기부금품법 개정안 역시 안건 상정조차 못하고 사라졌다.

12일 국무총리실 소속 시민사회위원회가 주최한 ‘시민사회 활성화 대토론회’에서는 시민사회 관계자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류홍번 시민사회위원회 제도개선분과 간사는 “정부 여당이 보여주고 있는 시민사회 관련 법제화 상황은 무관심, 무책임, 무능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이날은 ‘시민사회발전기본법’ ‘민주시민교육지원법’ ‘기부금품법’ 등 이른바 시민사회 3법에 대한 제·개정 필요성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美 비영리 일자리 전체의 10%… 한국은 1%

시민사회는 국가·시장과 구별되는 공공의 영역을 뜻한다. 법적인 형식에 따라 비영리법인, 협동조합, 비영리 민간단체 등으로 구분되지만, 개별 시민은 물론 시민들이 모인 작은 조직과 시민단체 등을 포괄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반민주적인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적 의미가 강한 탓에 오해도 많다. 이희숙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현재 수만 개 시민단체가 사회 각 영역에서 연대하고 활동하고 있다”면서 “시민사회를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지향하는 그룹으로 보는 인식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시민사회를 확대하고 지원하자고 할수록 점점 비판만 더 심하게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회원단체만 살펴봐도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동행, 교통문화운동본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등 사회 전 분야에 이르는 조직이 포함돼 있다.

국내 시민사회의 규모가 시장 규모에 비해 작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시민사회 조직의 구체적 현황을 살펴보면 국내 비영리민간단체는 약 1만4000곳, 협동조합·사회적협동조합은 약 1만9000곳이다. 사회적기업은 2900곳, 마을기업은 1500곳 수준이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공익 법인으로 구분되는 조직은 약 4만곳이 있지만, 법인세를 내는 영리법인 75만곳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다.

해외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영국은 자선위원회(Charity Commission)에 등록된 단체만 20만곳에 이르고, 호주 자선·비영리위원회(ACNC)의 등록 단체는 5만6000곳이 넘는다.

프랑스에서는 비영리 조직을 뜻하는 ‘아소시아시옹’ 붐이 일면서 15세 이상 프랑스인 2명 중 1명이 특정 아소시아시옹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희숙 변호사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는 시민사회 확대에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고용 창출 효과를 낸다는 게 이미 입증됐다”면서 “미국은 비영리 부문 고용 인원이 전체의 10%에 이르지만 한국은 약 1% 수준에 그친다”고 했다. 이어 “현재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한 정부 정책은 미비하고 공익 단체 비리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규제만 강화되면서 단체들의 활동과 존속이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생 비영리 발목 잡는 기부금품법

기부금품법 개정안 역시 시민사회의 숙원 사업 중 하나다. 현행 법률에는 1000만원 이상의 기부금을 모집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은 기부금품법에 따라 등록을 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신생 단체는 법인 설립 전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 후 기부금을 모집할 수 있는데, 기업에 대한 영수증 발급은 막고 있다. 또 개인 후원이 전체 수입의 50%를 초과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배분 단체의 사업비를 많이 받기도 어렵다.

다양한 기부 수요에 맞춰 등장하는 신생 비영리 단체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 규제다. 서울시 소재 시민사회단체 상근 활동가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활동가 2~5인 사이 소규모 단체가 전체의 42%에 이른다. 상증세법상 공익법인의 수입으로 보면 기부금 3억원 이하 단체가 84.2%에 이른다.

이날 전문가들은 “등록 대상과 사용 방법이 제한되는 사전 등록 제도를 통해 모금을 규제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모금을 허용하고, 사용 계획 고지와 결과 보고 등 필요한 절차·방법 등을 규정하는 방향으로 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기부금 모집 비용은 기부금의 15% 이내에서 쓸 수 있고, 나머지는 사업비로 사용해야 하는데 사업을 수행하고 직접 운동을 펼치는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는 허용되지 않는다. 동물 보호를 위한 공간 구입, 장애 어린이 병원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 등의 경우에도 내부 자산 형성이라는 이유로 기부금 사용이 막혀있다. 발달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회적기업이 인건비 마련을 위해 기부금을 모금하는 것도 제한된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시민사회 3법’ 제·개정에 대해 절박한 심정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신재은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정책·교육센터장은 “UN SDGs(지속가능개발목표) 문서에는 개별 시민부터 단체까지 모두 아울러 시민사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총목표 17가지와 세부 목표 169가지를 수립하고 이행, 모니터링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참여로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기현 대통령비서실 시민참여비서관은 “시민사회기본법을 비롯한 여러 관련 법안이 조속히 제도화되고 통과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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