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금)

적정기술의 명과 암_개도국 식수 공급하던 ‘플레이펌프’… 10년 만에 왜 보급 중단 됐을까

주목받았던 ‘플레이펌프’10곳 1500개 보급되었지만 편한 페달펌프 개발되자 현지 주민들에게 외면받아

창조경제와 맞물린 기술 개도국 주민에겐 도움주고 청년들에겐 연구·창업 지원

안정적인 현지화 위해서는 프로젝트 시작단계서부터 현장조사·개발 전략 필요

“요즘은 어딜 가나 ‘적정기술’이다. 미래창조과학부, 교육부, 외교부 등 각 부처마다 적정기술 강연이나 자문을 끊임없이 요청한다. 적정기술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개념인데, 유행처럼 번지는 분위기라 염려스럽다.”(국제구호개발 A단체 실무자)

“최근 과학자들 사이에선 연구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부처는 물론 각 기관, 연구재단 등에서 적정기술 관련 연구 공모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에 어떤 기술이 필요할지 먼저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이 기존에 연구했던 기술을 확장하려는 이들이 많다.”(B대학 교수)

‘적정기술’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적정기술’이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현지 재료를 활용, 이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부가 ‘창조경제’를 핵심 국정 과제로 발표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인수위 때부터 ‘창조경제’ 실현 계획 속에는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지난 5일 정부가 발표한 ‘창조경제 생태계 조성방안’에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됐다. “주요 개발도상국에 ‘과학기술 혁신센터’를 설치해 이들이 요구하는 ‘적정기술’을 상용화하고, 현지 창업을 연계하는 방식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적정기술 전략이 개도국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적정기술 혁신 아이콘으로 떠올랐던‘플레이펌프’는 10년 만에 실패 사업으로 평가받아 보급이 중단됐다. /플레이펌프 제공
적정기술 혁신 아이콘으로 떠올랐던‘플레이펌프’는 10년 만에 실패 사업으로 평가받아 보급이 중단됐다. /플레이펌프 제공

◇’창조 경제’와 맞물린 적정기술·청년 창업 열풍

창조경제와 적정기술이 정부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하자, 각 부처 및 기관들이 본격적으로 적정기술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민관협력 조직인 개발협력연대(Development Alliance Korea, 이하 DAK)는 지난달 ‘적정기술과 상생 비즈니스’를 주제로 정기회의를 열었다. 외교부 산하의 무상원조(ODA)기관인 코이카를 중심으로 몽골에서 친환경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사회적 기업을 확대, 지원하기 위해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4월, ‘제1회 따뜻한 기술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했다. 개도국 주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적정기술을 발굴, 당선자가 해당 기술을 연구·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적정기술을 비롯한 과학기술 나눔 활동을 본격화하고자 지난 5월 12일, ‘과학기술나눔공동체’를 출범했다.

이뿐만 아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이하 코트라)는 ‘적정기술’과 ‘청년 창업’이란 두 가지 키워드를 결합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4월 23일 ‘적정기술 창업지원 협의체(이하 협의체)’를 구성한 코트라는 “청년들이 개발도상국에 진출해 적정기술을 활용한 사회적 기업 또는 중소기업을 창업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SK행복나눔재단·굿네이버스와 함께 ‘제4회 적정기술 페스티벌’도 진행했다. 선발된 엔지니어, 사회적 기업 등 5개 팀에게 컨설팅을 제공해 국내외 현장에서 실제 창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적정기술을 연구하는 한 대학교수는 “최근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신설되면서 각 부처, 기관마다 창조경제를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 방안을 제출하고 있다”면서 “적정기술을 연구·보급할 인력과 시스템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 금액만 자꾸 늘어나니 부작용이 초래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적정기술 사회적기업인 킥스타트(Kick start)가 만든‘머니메이커(Money Maker·페달형 소형펌프)’는 적정기술성공 사례로 꼽힌다. 현재까지 20만개 이상 팔린 이 제품 은 3만5000명 이상의 고용 창출과 매년 4억5200만달러의 이익을 내는 등 소규모 영농인을 고객화하는 데 성공했다. /킥스타트 제공
적정기술 사회적기업인 킥스타트(Kick start)가 만든‘머니메이커(Money Maker·페달형 소형펌프)’는 적정기술성공 사례로 꼽힌다. 현재까지 20만개 이상 팔린 이 제품 은 3만5000명 이상의 고용 창출과 매년 4억5200만달러의 이익을 내는 등 소규모 영농인을 고객화하는 데 성공했다. /킥스타트 제공

◇한국을 위한 적정기술인가, 빈곤국을 위한 적정기술인가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빈곤국의 ‘니즈(needs·필요)’와 시장을 철저히 파악하지 않으면 기껏 연구한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정기술의 혁신 아이콘으로 꼽혔던 ‘플레이펌프’의 경우, 10년 만에 실패 사업으로 평가받아 보급이 중단됐다. 놀이기구처럼 손잡이를 돌리면 지하수가 끌어올려지는데, 처음에는 여럿이 재미로 플레이펌프를 돌리던 아이들이 혼자서도 쉽게 물을 얻을 수 있는 페달 펌프를 사용하게 된 것. 발명 직후 개도국 10곳에 1500개 이상 보급된 플레이펌프는 현재 현장 곳곳에 버려져 있다. 개도국에서 적정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한 NGO 실무자는 “현장 경험 없이 한국에서 발굴한 친환경 기술을 개도국에 도입했다가 주민들에게 외면받고, 현지 시장을 망가뜨린 사례를 여럿 봤다”면서 “적정기술은 시장에 어떻게 보급하느냐가 중요한데, 과학자들은 기술 개발에만 관심이 있고, 정부는 연구 이후 과정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C단체 관계자도 “국내 공기관들과 적정기술을 연구했는데, 지원금으로 기술 개발만 하고 현지 보급은 나 몰라라 하더라”고 했다. 축열난방기 ‘지세이버(G- saver)’를 개발해 몽골에 적정기술 사회적 기업을 세운 윤석원 굿네이버스 적정기술센터장도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개도국에는 법,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현지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고, 시장에 진입하기까지 엄청난 시행착오가 따른다”면서 “적정기술의 성공을 위해서는 시간, 비용, 인내가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준비된 시스템 없이 개도국에서 창업을 하게 될 청년들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조미현 SK행복나눔재단 사회적기업본부 SE지원팀장은 “4년째 적정기술 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적정기술에 대한 저변을 확대한 것은 만족스럽지만, 대부분의 청년이 현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서 “올해부터는 청년 사회적 기업가들이 개도국 현장에 직접 가서 기술을 연구,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흙탕물을 걸러주는 적정기술 제품,‘라이프스트로’ /Vestergaard Frandsen 제공
흙탕물을 걸러주는 적정기술 제품,‘라이프스트로’ /Vestergaard Frandsen 제공

◇긴 호흡으로 현장·기술·비즈니스 융합한 협력 모델 발굴해야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적정기술과 개도국 현장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홍성욱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은 “최소 5년 이상 투자해야 한다”면서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디랩(D-lab) 사례를 소개했다. “2002년 적정기술 교육 과정을 개설한 MIT 디랩은 IDDS(국제개발 디자인 서밋)등을 통해 전 세계 교수·학생 등 전문가 100명을 모아서 기술을 개발한 뒤, 매년 함께 아프리카에 가서 적정기술을 현지화하고 시장에 적용해본다”면서 “프로젝트 시작 단계부터 현장 조사, 기술 개발, 시장 전략이 함께 이뤄져야 청년들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업 성과를 성급하게 수치화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손혁상 경희대 NGO대학원 교수는 “청년들이 해외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된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지만, 개도국에서 청년 몇 명이 창업에 성공했는지 숫자로 평가하지 말고, 적정기술의 현지화를 위해 노력한 모든 과정을 성과화해야 한다”면서 “개도국 개발 현장 활동가·과학 기술자·비즈니스 컨설턴트 등 세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해, 현장·기술·경영 마인드를 고루 갖춘 청년을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김경하 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