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비롯해 일본과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제정 목적이 뚜렷하게 명시돼 있다. 투자 대상 회사의 중장기적 가치 제고, 그리고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2010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최초 도입한 영국은 2019년 10월 개정안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투자 대상 회사의 ESG (Environmental·Social·Governance) 요소를 고려한 장기적 투자를 요구하는 내용을 새롭게 추가했다. 일본도 같은 내용을 지난해 3월 반영했다. 그만큼 수탁자 책임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관심이 ESG 부분에 집중됐다는 의미다. 국내에서도 조만간 ESG 요소를 명시적으로 반영한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ESG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논의가 투자 사슬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두드러지는 ESG에 대한 논의 역시 현 자본주의에서 투자자가 해오던 재무성과 위주의 단기주의 투자(short-terminism)에 대한 경각심과 아울러 투자자들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함께 증가한 결과다. 현재 많은 이해관계자는 ESG를 고려한 장기투자와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변화(change)하는 것을 넘어 전환(transformation)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 컨설팅 기업 액센츄어에서 글로벌 지속가능성 서비스를 책임지는 피터 레이시(Peter Lacy)는 지난 2012년 영국 가디언지와 인터뷰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실행격차(execution gap)’와 ‘변환격차(transitional gap)’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실행격차’를 좁히는 일은 파리기후협정에 의한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 목표나 개별 기업들이 설정한 전략적 목표와 같이 확립된 목표를 향한 실질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물론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한다. ‘변환격차’를 해소하려면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시스템에 대한 제고와 함께 사람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나 사업의 재편, 금융시장에서의 참가자들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활동이 필요하다.
ESG에 대한 논의를 좁게 해석하면 투자자들이 실행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투자 대상 회사와 함께 변환격차를 줄이기 위한 ‘게임의 룰’을 재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정부와 국회는 관련 정책들로 뒷받침해야 한다.
ESG는 CSR 논의의 하나이며 사회적인 기대가 투영된 단어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이슈와 더불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전례 없던 불확실한 시기를 지나면서 ESG는 CSR의 화두가 됐다. 많은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전 지구적 차원의 지속가능성과 투자 사슬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결국 장기적 투자를 유도하는 다양한 형태의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투자자들은 수익 창출뿐만 아니라 피투자 대상 회사들에 ESG 요소를 고려한 기업 경영을 장려하고 실제 투자에서 ESG 요소를 보상해 주거나 페널티를 주려고 한다.
한국은 ESG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국내 대기업에서 CSR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0년도 초반이다. 여느 케이스처럼 글로벌 고객사들의 요구와 업계 동향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됐다.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국내 대기업의 CSR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기업들이 홍보 일색의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발간하고, 외부의 CSR 관련 평가나 수상에만 초점을 맞춰온 측면도 강하다. 학계나 투자자, 정부 등 여러 이해관계자 그룹에서도 우리 기업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어지지 않는다. 왜 CSR에 신경 써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공감대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부는 ESG 논의가 한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실행격차와 변환격차를 줄여나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서의 바람직한 역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 내에 산재돼 있는 ESG 관련 이슈들이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자본시장의 투자자들과 피투자 회사들은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이런 논의에 기반해 결국 우리 기업들의 설명책임 내용과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201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보고서에서 지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2년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다. 혹자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바른 방향으로 항해가 진행돼야 한다.
정영일 넷임팩트코리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