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년 어느 겨울 밤, 지선(가명·15)이와 언니, 남동생은 ○○원에 왔다. 한밤중 급하게 나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였다. 세 남매는 수년간 아빠의 거친 욕설과 폭력을 견뎠다. ‘훈육’으로 시작된 매질은 갈수록 강도가 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세 남매는 이웃에 도움을 청하면서 지옥같던 친부의 학대에서 벗어났다. 안전한 시설로 왔지만 지선이에게는 상처가 남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몸집이 큰 남자를 보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지선이는 고등학생 오빠의 작은 장난에도 버럭 화를 냈고, 학교 남학생이 말을 걸면 짜증으로 대꾸했다.
#2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건데요. 어렸을 적 이야기는 할 말도 없고 기억하기 싫어요.”
동현(가명·17)이는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거리를 전전하다 □□원에 왔다. 아이는 선생님의 질문에도 눈만 꿈뻑이다 “네, 아니오”만 했고, 무기력하게 구석 자리를 지켰다. 방화, 현금 및 스마트폰 절취.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동현이의 과거는 파란만장했다. 이혼 후 재혼한 동현이 아빠는 몇달씩 가출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아이를 포기했다. 동현이는 청소년이 되기까지 어디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4592명. 지난 2016년 한 해 동안 부모의 빈곤과 실직, 학대, 가출, 미혼모·부 등으로 아동복지시설, 위탁가정 등에 보내진 국내 아동의 수(보건복지부, 2016년 요보호아동 발생 및 조치현황)다. 한국아동복지협회에 따르면, 불안정한 양육환경을 경험한 아동은 심리·정서적 불안감을 호소하거나, 내면의 문제가 행동으로 표출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실제 해당 아동의 34%(1540명)는 학대를 경험한 피해 아동이다.
시설 아동에 대한 심리 치료·재활 서비스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보건복지부는 2012년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아동복지협회가 보건복지부로부터 위탁받아 올해로 시행 7년차를 맞은 ‘시설 아동 치료·재활 지원’ 사업이다. 전국 아동복지시설 및 그룹홈(공동생활가정) 아동 중 심리·정서·인지·행동상 어려움을 겪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심리검사, 치료 프로그램 및 가족 역량 강화 프로그램 지원 등 ‘맞춤형 치료·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아동 뿐 아니라, 실무 종사자를 위한 교육, 전국 시·도별 자원 네트워크 구축, ‘아동행복 찾기’ 매뉴얼 발간 등 종사자와 지역사회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선이와 동현이 역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했다. “남자애들이 불편하다”고 호소했던 지선이는 상담선생님과 함께 모래놀이 및 요리치료를 시작했다. 총 13회기의 개별 상담을 통해, 아이는 정서적인 안정을 찾고 아빠 및 남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고쳐 나갔다. 엄마와 주 1회 통화를 나눴고 워터파크, 바다여행 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여가도 즐겼다. 지선이의 사례 담당자는 “(지선이가) 매우 밝아지고 남자 또래에 대한 불편감이 많이 해소됐다”며 “편하게 장난치는 남자친구도 생겼다”고 했다.
가족과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버린 듯 보였던 동현이는 총 12회의 개인상담에 참여했다. 진로 탐색을 위한 대학 입학 검정고시와 바리스타 공부를 시작해 꾸준히 지속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싶다’, ‘사회에 빨리 나가 일하고 싶다’던 동현이의 욕구를 반영해 계획한 프로그램이었다. 동현이 아빠도 가족의 관계회복을 위한 부모교육에 참가하기도 했다. 동현이는 검정고시 합격과 바리스타 자격증 획득이라는 성취 경험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동현이의 사례 담당자는 “큰 쾌거를 이루면서 성취감과 자기효능감이 높아졌으며, 본인 또한 결과에 만족해한다”고 했다.
수치도 효과를 뒷받침한다. 두 아동 모두 아동·청소년 행동평가척도(K-CBCL)상으로도 문제 행동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선이는 K-CBCL 점수가 무려 39점 줄었고(사전 91, 사후 52), 동현이 역시 11점 감소(사전 69, 사후 58)했다. 임상심리 측면에서는 문제행동 총점이 1점이라도 감소하면 치료효과가 큰 것으로 판단한다. 지난 2017년 사업에 참여한 585명 아동은 평균 12.9점만큼 문제행동이 줄었고, 특히 미취학 아동(139명)의 경우 18.47점이나 문제행동이 감소해 개입시기가 빠를수록 효과가 컸다. K-CBCL은 아동 및 청소년의 사회 적응 및 정서행동 문제를 평가하는 세계적인 척도다.
자아 존중감도 높아졌다. 자아존중감 척도(SES)로 지난해 참여 아동들의 전후를 비교한 결과, 미취학 아동이 평균 2.26점, 초등학생이 0.17점, 중·고등학생이 1.24점 상승해 평균 1.43점이 올랐다. 동현이는 상담 중 ‘자아분석 인생태도검사’도 받았는데, 검사 결과는 ‘자기긍정-타인긍정’으로 나타났다. 자기 및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함을 보여주는 결과다. 동현이는 참여 수기에 “상담을 받으면서 인생에 관한 계획도 세우고 원래는 꿈이 없었지만 꿈도 확실하게 생겼다”며 “퇴소해서도 다시는 잘못된 생각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썼다.
지난해까지 한국아동복지협회의 ‘시설 아동 치료·재활사업’을 통해 혜택을 받은 아동은 총 3448명. 6년간 총 54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매년 500명 이상의 시설 아동이 지원을 받았다. 2016년부터는 그룹홈에 대한 지원도 시작돼 약 60여명의 그룹홈 아동이 혜택을 받았다. 한국아동복지협회는 효과성 평가 및 사례관리 성과 연구로 연구보고서를 발간, 지속적으로 시설 내 아동들을 지원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