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 사회안전망 아니다”…냉정해진 원조에 인도주의 위기 커져 [글로벌 이슈]

美 인도주의 대응국 신설에도 예산·지원 범위 모두 축소…英, 기후원조 14% 삭감
유엔, 재원 부족에 지원 대상 1억3500만→8700만 축소…생존 중심 선별 지원

글로벌 원조 체계가 ‘보편적 지원’에서 ‘선별적 대응’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 공여국이 자국 이익과 안보를 고려해 원조 규모와 지원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면서, 보건·식량·기후 대응 등 필수 지원이 줄고 취약국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국무부는 3월 전 세계 자연재해와 인도주의 위기 대응을 총괄하는 ‘재난 및 인도주의 대응국(Bureau of Disaster and Humanitarian Response)’을 신설했다. 국무부는 3월 23일(현지시각) 관보를 통해 재난 및 인도주의 대응 담당 차관보에게 국제 재난 지원, 글로벌 식량 안보, 인도주의 대응 관련 권한을 위임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USAID를 해체해 기능을 국무부로 이관했고, 국무부는 3월 ‘재난 및 인도주의 대응국’을 신설했다. 기존보다 예산과 지원 대상이 축소됐다. 사진은 미 국무부 상징 깃발. /미국 국무

새 조직은 약 200명 규모로 전 세계 12개 거점에서 운영되며 연간 약 54억 달러(한화 약 8조1500억 원) 예산으로 ‘생명 구호’ 중심 지원에 집중할 예정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해체하고 관련 기능을 국무부로 통합했다. 기존 USAID는 연간 약 400억 달러(한화 약 60조 원) 규모의 개발·인도주의 사업을 수행해 왔다. 이에 비해 새 조직은 예산 규모와 지원 범위가 모두 축소됐다.

3월 20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관계자는 “우리는 대응 대상을 더 신중하게 선택할 것”이라며 “모든 재난과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미국의 책임은 아니며, 특히 미국의 적대 세력이나 미국을 증오하는 집단이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고 전했다. 이어 “우리는 세계의 경찰도, 사회안전망도 아니다”라며 “동맹국과 전략적 파트너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국가 이익에 중요한 사안에는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ODA 대폭 삭감한 英, 기후원조부터 줄인다

영국은 개발도상국 대상 기후원조를 약 14% 줄여 연간 약 20억 파운드(한화 약 4조200억 원) 수준으로 낮춘다고 19일(현지시각) 발표했다. 이는 지난 2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ODA를 국민총소득(GNI)의 0.5%에서 0.3%로 줄이겠다고 밝힌 데 따른 후속 조치다. 줄어든 재원을 항목별로 재배분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기존 5년간 116억 파운드(한화 약 23조3100억 원)였던 기후재원 계획은 3년간 약 60억 파운드(12조600억 원) 규모로 축소하고, 자연·산림 예산도 폐지했다.

영국 정부는 기후재원을 줄이는 대신 분쟁 지역 대응에 재원을 집중할 계획이다. 이베트 쿠퍼 영국 외무장관은 수단, 우크라이나, 레바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은 유지하겠다며, “투자 여력이 줄어든 만큼 가장 큰 영향을 낼 수 있도록 재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터키를 제외한 G20 국가 원조를 단계적으로 종료하고, 아프리카와 중동에 대한 직접 지원도 줄이겠다고 설명했다.

원조가 줄면서 기후와 자연 분야 예산이 먼저 줄어들고, 그 결과 장기 개발과 기후 대응이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 보존협회 영국지부의 조너선 홀 상무이사는 “자연·삼림 보호 지원 축소는 과학적 근거와 기존 정책 방향에 모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전 국제개발부 장관 가레스 토마스는 “원조 삭감은 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취약국의 보건·교육 개선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짚었다.

◇ 허리띠 졸라매는 유엔, 1억3500만명에서 8700만명으로 선별 지원

공여국들의 원조 축소 속에 유엔은 재정 압박으로 인도주의 지원 대상을 1억3500만 명에서 8700만 명으로 줄이고, 생명구호 중심으로 체계를 재편하고 있다. /Unsplash

공여국들의 원조 축소와 선별 지원 기조 속에 유엔(UN)은 제한된 재원 안에서 인도주의 대응 체계를 조정하고 있다. 유엔은 2월 27일 총회 브리핑에서 생명구호를 최우선으로 공급망·데이터·공동서비스를 통합하는 방향의 개편안을 내놨다. 이에 대해 톰 플레처 유엔 긴급구호조정관은 “생명을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026년 글로벌 인도주의 대응 계획 역시 대폭 축소됐다. 유엔은 당초 약 1억3500만 명을 대상으로 330억 달러(한화 약 50조 원) 규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실제 계획은 약 230억 달러(한화 약 34조7000억 원)로 줄이고 지원 대상도 가장 긴급한 8700만 명으로 한정했다.

한편 원조 축소의 영향은 이미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글로벌 개발원조가 2024년 9% 감소한 데 이어, 2025년에는 9~17% 추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우 원조 감소 폭이 최대 28%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의학저널 랜싯(The Lancet)은 지난 2월 이 추세가 이어지면 2030년까지 전 세계에서 추가로 약 940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삭감 폭이 더 커지면 사망자는 최대 2260만 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 록펠러재단의 라지브 샤 회장은 이를 두고 “80년에 걸쳐 구축된 구조가 해체되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댓글 작성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