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던 아이가 “더 풀래요”…게임처럼 배우는 점자 교구의 힘

중고폰과 RFID 카드로 만든
‘하루 10분’ 점자 학습 교구 개발기

“기역은 몇 번 점일까요?”

점자가 새겨진 작은 카드를 스마트폰에 갖다 대자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끝으로 점자를 더듬으며 숫자 버튼을 누르자, “정답입니다!”라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음 문제가 이어졌다.

SK행복나눔재단이 개발한 점자 학습 장난감 ‘슬라이닷(Slidot)’. /행복나눔재단

SK행복나눔재단이 개발한 점자 학습 장난감 ‘슬라이닷(Slidot)’의 이야기다. 지난 25일 열린 ‘프로젝트 줌인’ 세미나에서 이 제품이 공개됐다. 스마트폰과 9개의 버튼이 달린 작은 본체에, RFID 스티커가 붙은 점자 카드만 있으면 게임을 하듯 점자 공부를 할 수 있다.

시각장애 아동을 지원해온 재단은 지난 3~4년간 이들의 학습 환경을 분석했다. “점자 배우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릴 때 울면서 외웠다”는 아이들의 말에, 재단은 기존의 종이 인쇄 방식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슬라이닷 개발을 총괄한 곽예솔 SK행복나눔재단 전략기획팀 매니저는 “고통이 아닌 ‘재미’로 점자를 배울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 “단순하고 싸게, 하지만 오래 쓰게”

슬라이닷 개발 목표는 단순했다. 값싸고, 쉽고, 아이가 매일 쓰고 싶게 만들 것. 첨단 점자 디스플레이는 생산비가 너무 높았다. 대신 점자가 새겨진 종이 카드에 RFID 스티커를 붙이는 저비용 구조로 전환했다. 카드 한 장당 제작비는 1500원 수준. 총 2000여 개의 문제 카드가 만들어졌다.

본체에는 중고 스마트폰을 넣었다. 5만 원대 기기 하나에 스피커, 디스플레이, 리더기가 모두 들어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외형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고 브릭’ 형식으로 바꿨다. 수정과 조립이 쉬워 실사용자 반응도 좋았다.

SK행복나눔재단이 개발한 점자 학습 장난감 ‘슬라이닷(Slidot)’의 애플리케이션 화면. /행복나눔재단

퀴즈 앱도 공을 들였다. 또래 아이의 목소리로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히면 효과음과 함께 “신기록 달성!”과 같은 메시지가 뜬다. 아이가 직접 녹음한 목소리를 정답 리액션으로 쓰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에 연속 정답을 맞히면 콤보 점수를 주고, ‘오늘의 문제 10개 풀기’ 같은 미션도 추가됐다. 보호자가 매일 미션을 전송하면 아이는 장난감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곽 매니저는 “점자는 매일 10분씩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이 스스로 연습을 원하도록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 연습일 60%↑…점자 입력 실력도 ‘쑥’

개발까지 총 2년 3개월이 걸렸다. 올해 1월부터 시각장애 아동 5명을 대상으로 사전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처음엔 점자책을 펴는 것도 꺼리던 아이들이, 이제는 “더 풀고 싶다”며 스스로 장난감을 찾는다.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실험한 결과, 점자 학습일은 평균 60% 이상 증가했고, 슬라이닷을 꾸준히 쓴 아동은 점자 모양 구별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SK행복나눔재단이 지난 25일 ‘프로젝트 줌인’ 세미나를 개최하고, 슬라이닷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했다. 사진은 곽예솔 SI사업팀 청년인재교육 매니저가 발표하는 모습. /조유현 기자

보호자와 특수교사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비싼 점자 디스플레이 대신, 꼭 필요한 기능만 담아 실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주효했다. 아이들이 익힌 점자 입력 방식은 점자 단말기 ‘한소네’ 사용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설계됐다는 점도 강점이다.

슬라이닷은 현재 상용화 방식을 검토 중이다. 가정 내 반복 학습에 초점을 맞춰, 판매와 기부 모델을 모두 열어두고 있다. 곽 매니저는 “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점자 학습 기기 시장이 방치돼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슬라이닷이 시각장애 아동에게 점자를 친숙하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