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AVPN, 세계 벤처 기부의 흐름을 보다
‘사회적 임팩트’ 키워라
홍콩 벤처 기부 투자기관 ‘소셜벤처스 홍콩’… 정부 건물 빌려 저소득 한부모 가정에 전대영역 넘어선 협력
네팔 등에 깨끗한 물 공급 사업하는 ‘스플래시’… 정부·학교와 파트너십, 낮은 가격에 필터 공급
지난달 20일부터 2박3일 동안 싱가포르국립대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벤처필란스로피네트워크(AVPN) 국제 콘퍼런스의 주제는 ‘벤처 기부의 실제(Venture Philanthropy in Practice)’다. 미국, 유럽, 아시아 국가를 막론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는 ‘벤처 기부’의 다양한 사례를 토론한 자리였다. 아직 국내에선 의미조차 생소한 벤처 기부의 글로벌 트렌드를 엿보기 위해, 더나은미래 주선영 기자가 콘퍼런스를 현장 취재했다. 편집자 주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갈 때 최소한 목적지는 정해둬야 어떤 길로 갈지 결정할 수 있죠. ‘벤처 기부’는 기부나 임팩트 투자 같은 ‘사회적 자본’을 갖고 무슨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지, ‘결과물’을 미리 정의 내리고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목적지를 정한 후, 그걸 이루기 위한 전략과 방안을 고민하고 경로를 짜는 거죠.”
아시아벤처필란스로피네트워크를 설립한 동 밀러(Doug Miller) 창립대표의 말이다. 2012년 만들어진 아시아벤처필란스로피네트워크는 아시아 지역 내 벤처 기부, 사회적투자, 사회적기업 등에 관계된 이들을 위한 네트워크 조직이다.
“벤처 기부라는 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쯤 이런 활동을 하는 기관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습니다. 그때는 각자가 기관 차원에서 해왔을 뿐 큰 흐름으로까지 묶이진 않았죠. 하지만 이제는 국가나 사회적기업·비영리 구분 없이, 사회적 변화와 결과물을 중시하는 이들이 큰 흐름이 됐습니다.” 2005년부터 이미 유럽 브뤼셀을 기반으로 유럽벤처필란스로피협회(EVPA), 유럽벤처필란스로피펀드(EVPF)를 설립해 이끌어온 그는 “아시아 지역에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더 많은 협력이 일어나고 집단 지성이 발휘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다양한 스펙트럼, 핵심은 ‘사회적 임팩트’
28개국에서 모인 500여명의 참가자는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사회적기업을 대상으로 임팩트 투자를 하는 영리 사모펀드부터 사회적기업가들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비영리단체를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실제 현장에서 움직이는 사회적기업까지 있었다. 다루는 주제도 다르고 기관의 운영 방식도 달랐지만, 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같았다.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가’였다.
“사회적기업이니, 임팩트 투자니, 벤처 기부니, 비슷한 활동인데 서로 다른 표현을 쓰잖아요. 또 용어 간에 의미하는 바가 약간씩은 달라 혼란스럽다는 사람도 있어요. 장담하건대 앞으로 10년간은 새로운 용어들이 훨씬 많이 등장하고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나쁘게만 볼 건 아니라고 봐요. 과거 아주 오랫동안 ‘전통적인 비영리와 영리’ 두 개로 명확하게 나뉘었다면, 이제는 그 사이 느슨한 중간 지점이 생긴 거죠. 그게 훨씬 더 촘촘하게 세분화되는 과정이고요.”
홍콩 최초의 벤처 기부 투자기관인 소셜벤처스 홍콩(SVhk·Social Ventures Hong Kong) 대표 프랜시스 아이(Francis Ngai)의 말이다. 그가 2007년 설립한 소셜벤처스 홍콩은 기반이 갖춰진 사회적기업에 벤처 기부를 하고, 초기 단계 사회적기업을 교육하고 인큐베이팅한다.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이 모여 사는 공동 주거 공간 ‘라이트 비(Light Be)’는 소셜벤처스 홍콩의 투자를 통해 사회적 임팩트를 키운 사례 중 하나다. 소셜벤처스 홍콩에서 안정적인 가격으로 임대하는 건물을 빌려, 공간을 개조한 후 다시 저소득 한부모 가정에 전대(轉貸)하는 형식이다. 건물주는 안정적인 임대수익에 더해 제3자가 빌딩을 무료로 관리해주니 좋고, 저소득 한부모 가정은 방에 따라 2~3가구가 모여 살며 육아와 생활 등 ‘지지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주는 형태다. 최대 3년간 거주하며 이후에는 자립해야 하는 것도 기존의 지원과는 다르다. 프랜시스 대표는 “최근 홍콩 정부가 쓰지 않는 건물 하나를 빌려 총 45가구가 입주했으며, 총 150가구가 이런 대안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면서 “정부 입장에선 ‘건물을 비워두고 놀린다’는 데 대한 비판도 줄이고 사회적으로 좋은 이미지도 얻으니, 앞으로 더 많은 협력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깊은 관여’, 조직 역량 키우고 생태계 다지고
벤처 기부를 하는 기관들엔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다. ▲지원하는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기관 자체의 역량을 키우며 ▲금전적 지원 외에도 다양한 비(非)재정적인 지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각 기관이 ‘사회적 영향력’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이후 평가는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도 뒤따른다. 파트너 단체를 선정해,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긴 기간에 걸친 긴밀한 파트너십도 필수다.
“인도 인구가 12억입니다. 이 중 약 11억명이 하루에 5달러 미만을 벌어요. 인도의 비영리기관 수만 해도 330만곳이에요. 싱가포르 인구와 비슷한 정도죠. 학교, 의료, 농업 등 정부에서 해야 할 대부분의 일이 비영리단체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규모로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기관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도의 전략적 기부 재단인 다스라(Dasra)를 설립한 데발 상하비(Deval Sanghavi) 대표는 “어떤 분야에서 어떤 단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연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가령 가정폭력 분야에서 300여개의 단체를 찾고, 그 기관들을 연구해 예산이나 자본이 건강한지, 일하는 방식은 어떤지 등을 조사한 것이다. 그중 다시 확장 가능성이 있고 큰 임팩트를 낼 가능성이 있는 곳만 골라 다시 분야당 10~30개로 추렸다. 추려진 150개 기관에 대해 역량 강화 트레이닝도 실시했다. 이후 최종 투자를 받은 곳은 10여곳. 데발 대표는 “연구를 통해 모아놓고 보니 어떤 분야가 비어 있고 어떤 분야가 포화 상태인지 알 수 있었고, 이젠 정부에서도 이 보고서를 참고한다”며 “이 과정에서 많은 비영리, 사회적기업과 관계를 맺으면서 비영리 영역 전반과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체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영역을 넘어선 ‘다양한 협력’
콘퍼런스에 만난 이들은 비영리·사회적기업·기업·정부 등 영역 구분이 없었다. 네팔·캄보디아·방글라데시·인도·중국 등에서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목표로 일하는 비영리단체 스플래시(Splash)가 한 예다. 스플래시의 설립자 에릭 스토웨(Eric Stowe)씨는 “12년 전 중국에서 고아원은 정수시설을 감당할 수 없어 더러운 물을 마시는데 그 옆 맥도널드는 깨끗한 물을 마시는 걸 보고, 몰래 돈을 찔러주고 대기업에서는 어떤 정화 필터를 쓰는지 확인했었다”며 “정화 필터를 아이들이 많은 곳에 설치해 깨끗한 물을 먹게 하고자 단체를 설립했다”고 했다. 단체가 일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직접 나서 필터를 설치해주는 게 아니라, 각 국가의 정부와 협력해 지역의 학교, 고아원 등과 파트너십을 맺어 낮은 가격에 필터를 제공한다. 지역 사람을 채용해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게 하는 것도 핵심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가장 큰 민간 비영리단체 브락(Brac)과 협력한다. 에릭은 “정부는 우리가 깨끗한 물을 위한 기술을 제공하니 좋고, 우리는 지역 내 사회적 임팩트를 확장할 수 있다”며 “스플래시의 개입 없이 모든 곳에 필터가 설치돼 돌아가는 시기를 ‘출구(Exit) 시점’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나이나 바트라(Naina Batra) 아시아벤처필란스로피네트워크 대표는 “사회 정책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정책을 이해하고 정부와 파트너십을 맺는 게 중요한데, 과거 비영리에서는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꺼리거나 어려워했지만 이제는 협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 등 아시아 지역에 걸쳐 정부가 사회적기업, 비영리 영역에 참여하려 하고 정책적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주목할 만한 흐름”이라고 했다.
벤처 기부(Venture Philanthropy)란
‘재단은 벤처 자본가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1997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논문 제목이다. 벤처 기부는 기존의 전통적인 자선 방식의 기부와는 달리 벤처 투자 방식을 도입한 혁신적이고 전략적인 방식의 기부를 말한다. 전통적인 기부는 비영리기관의 특정 프로그램에 짧은 기간에 걸쳐 지원하거나 당장 자금을 나눠주는 식이었던 것에 비해 벤처 기부는 특정 조직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게 핵심이다.
벤처 기부라는 용어가 주목받게 된 것은 1990년대. IT 벤처 기업을 통해 성공한 젊은 기업가들이 기존의 자선과는 다른 좀 더 효과적인 기부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젊은 벤처 기업가들은 개인의 이름으로 일방적인 기부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가진 경영 전문성을 갖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를 원했다. 전략성, 혁신성, 사회적 임팩트, 책임성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벤처 기부의 특징은 ▲기부 기관과 단체 간의 고도의 파트너십 ▲맞춤형 재정 지원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인 지원 ▲포괄적인 ‘비재정적 지원’ ▲프로그램 자금 지원을 넘어선 ‘조직의 역량 강화’ ▲사회적 임팩트에 대한 성과 평가 등이다.
싱가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