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학당재단 10년, 선순환 임팩트]
몽골을 시작으로 세계 각지 설립
세종학당 누적 수강생만 58만명
교수·소리꾼… 학당 출신들 활약
케냐 나이로비에서 70㎞ 떨어진 작은 마을. 고등학교를 갓 마친 필리스 은디앙구씨는 한국 유학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막연히 동경하던 한국 문화에 몸이 끌렸다. 우선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당시 케냐에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은 나이로비 세종학당(King Sejong Institute)이 유일했다. 그렇게 2011년 3월, 무작정 세종학당 문을 두드렸다.
세종학당재단은 해외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보급하는 세종학당을 지원하는 법정 공공기관이다. 국어기본법 제19조에 따라 지난 2012년 설립돼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세계 각지에 설치된 세종학당은 재단 설립보다 5년 앞선 지난 2007년 몽골 울란바토르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올해 기준 84국 244곳으로 확대됐다. 수강생은 사업 첫해 740명에서 2012년 2만8793명, 2014년 4만4146명, 2020년 7만6528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수강생이 처음으로 8만명을 돌파하면서 14년 만에 100배 이상 증가했다. 세종학당 첫 개소 이후 지금까지 누적 학습자는 58만명에 이른다.
10여 년 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세종학당을 찾았던 은디앙구씨는 현재 케냐타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한국 유학의 꿈을 이루고 다시 고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건 특별한 인연 덕분이다. 은디앙구씨가 세종학당에 들어간 그해 케냐 세종학당에 새 학당장이 부임했다. 공군 대령 출신 김응수(76)씨다. 그는 은퇴 후 케냐에 정착해 현지 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학비를 지원했고, 신원 보증이 필요할 때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로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기회는 불현듯 찾아왔다. 숙명여대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추천서와 함께 고등학교 졸업장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은디앙구씨는 “고등학교 과정은 마쳤지만 마지막 학비를 내지 못해 졸업장이 없었고, 장학생 지원 서류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소식을 들은 김응수 학당장이 고등학교에 찾아가 마지막 학비 400달러를 내줬고, 간신히 받은 졸업장으로 한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나이로비 세종학당의 ‘1호 장학생’이 된 은디앙구씨는 숙명여대에서 미디어학부를 졸업하고 마케팅 석사 학위도 받았다. 지난 9월부터는 케냐타대학 내 세종학당에서 현지 학생들에게 ‘세종한국어1과 회화’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은디앙구씨는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졸업하면 세종학당으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하고 싶었다”며 “세종학당 교원으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일주일 만에 귀국을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사연은 배우던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 선순환의 대표적 모델이다. 케냐의 은디앙구씨처럼 세계 곳곳의 세종학당 출신들은 한국 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어 교원이 되거나 번역가, 소리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트남의 껀터1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교원으로 일하는 응웬 티 홍탐(25)씨는 지난 2016년 한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 불과 4년 만인 2020년, ‘세종학당 말하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한국 어학연수 기회를 얻었고, 올해 상명대학교 국제언어문화교육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 까닭은 고향에 한국 문화를 전하고자 함이었다. 홍탐씨는 “베트남의 한국어 열풍으로 학습 수요는 높지만 껀터 지역은 호찌민에서 4시간 떨어진 외곽이라 한국어 교원이 부족하다”며 “한국 생활에 관심이 많은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어뿐만 아니라 좀 더 생생한 한국 경험도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호주 시드니문화원 세종학당 출신인 앤서니 맥메너민(30)씨는 번역가다. 지난해 10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제2회 한류 문화 콘텐츠 번역 콘테스트’에서 웹툰 번역으로 대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영화 자막 번역 등 ‘문화 번역가’ 꿈을 키우고 있다.
마포 로르(38)씨는 프랑스 한국문화원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삼성전자 파리 지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한국 문화 수업에서 운명처럼 판소리에 이끌려 소리꾼이 됐다. 지난 2015년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 유학을 결정했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판소리 전공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한국 유학을 결정한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며 “판소리는 꿈이 되고 목표가 됐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