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재개발에서 도시재생, 다시 재개발로… 예지동 시계 골목 상인의 한숨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 골목은 한때 300개 넘는 점포로 빼곡했다. 1960년대 청계천 인근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권이다. 당시 고급품이던 시계를 구매하고 수리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예지동 시계 골목’에 남은 상인은 거의 없다.

지난 14일 찾은 예지동 시계 골목은 재개발 작업으로 시끄러운 공사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세운상가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잿빛 철제 울타리가 벽을 따라 길게 세워져 있었고, 굳게 내려진 철문에는 이전 안내문과 함께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상인들로 가득했던 예전 시계 골목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거리에서 매대를 펼쳐 놓고 시계 수리를 하는 상인들을 만났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 노점상인 연합회 회원들이 거리로 매대를 이끌고 나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 노점상인 연합회 회원들이 거리로 매대를 이끌고 나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60대 시계수리공 A씨는 재개발로 인해 상인 대부분이 떠난 골목에 아직 남아있다. 노점 매대에서 시계 수리를 하던 그는 “이제 어디서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A씨가 가게를 떠나 거리로 나온 건 지난해 12월이다. 그가 수십년간 운영해온 점포가 재개발 대상지인 ‘세운4구역’에 포함되면서다. 이주 작업을 위해 SH서울주택도시공사(이하 SH공사)는 상인들의 점포를 일반 상점, 창고이용형 상점, 매대형 상점 등으로 구분해 보상금을 차등 지급했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고 이주를 하지 못한 상인들은 약 30명 정도다. A씨는 “100만원 남짓 보상금을 들고 갈 곳은 없다”라며 “이사 비용도 안 된다”고 했다.

일부 상인들은 바로 옆 세운상가로 옮겨 영업을 지속했다. 시계수리공 B씨는 종로에서 40년 일했다. 그는 “처음 가게를 열 때가 1980년인데 그땐 이 골목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파도에 휩쓸려가듯 사람이 많았다”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강남이나 홍대 같은 곳이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 속도에 맞춰 부품을 제작해냈어요. 진공관부터 라디오, 무선전화기까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금방 익히고 수리할 수 있었지요. 여기 상인들만 모이면 탱크가 순식간에 나온다고 하잖아요. 이곳이 전자·전기 기술의 성지가 된 건 상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재개발로 없어지게 생겼지만요.”

길어지는 이주 협의로 아예 예지동을 떠난 상인도 있다. 종로4가 보석세공단지로 자리를 옮긴 C씨는 “반복되는 이주 협의로 피곤함을 느껴 세운상가를 떠났다”면서 “많은 동료 상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연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재개발을 하더라도 목적에 맞게 도시가 설계되고 건축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단순히 부동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진행되면서 상인들만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재개발 공사로 상인들이 떠난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의 점포에는 이전 안내문과 함께 연락처가 남아 있다.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재개발 공사로 상인들이 떠난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의 점포에는 이전 안내문과 함께 연락처가 남아 있다.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세운4구역 재개발사업 계획과 주체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은 서울시 재개발 사업이었다. 2004년 서울시는 서울특별시고시를 통해 세운4구역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2년 뒤인 2006년 오세훈 시장 재임 당시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사업이 본격화됐다. 서울시는 2009년 해당 지역을 철거하고 주변 8개 구역을 통합 개발하겠다고 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이후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면서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후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세부 내용을 변경해 2018년 6월 종로구청으로 사업을 이관했다. 종로구청으로 책임 권한이 옮겨간 뒤 2018년부터 2020년에 걸쳐 사업시행계획이 재개발 사업으로 다시 구체화했다.

예지동시계노점상인연합회 회원 55명은 지난 4월12일 종로구청에 세운4구역 재개발사업에 관련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는 합의 금액 조정과 대체영업장 마련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종로구청은 시행사와 이야기하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SH공사는 세운4구역 재개발사업을 진행하며 시계 골목 상인들에게 세운스퀘어와 가든파이브로 이주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이에 상인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임시이주상가’라는 점이다. 세운4구역의 재개발이 끝나면 상인들은 부동산 가치가 올라간 장소에 알아서 입주해야 한다. B씨는 “이미 상권이 죽은 곳으로 보내면서 생색만 낸다”면서 “그냥 방 빼라는 뜻”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세운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한국적 도시재생 모델의 부재에서 일어난 일로 분석했다. 서진형 경인여대 교수 겸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는 “도시재생사업은 철거를 통해 공간을 재개발 방식과 문화를 보존하는 방식이 있는데, 문화보존방식은 도시의 역사가 오래된 유럽에서 했을 때 실효성이 있고 비교적 역사가 짧은 서울엔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세운상가 전체 철거를 통한 전면 재개발도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해 진행하기 어려움이 있다”며 “공공임대 상가에 기존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방식을 통해 세운상가에 있던 기존 공동체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원규 더나은미래 인턴기자 won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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