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방] 사과 없는 사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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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최숙현 선수가 제 길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뒤통수 한 대를 (때린 것을) 인정합니다. 이런 신체접촉 또한 상대방에게는 폭행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저의 안일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다시 한번 반성하고 깊이 사죄드립니다.”

사건·사고의 주인공들이 올리는 ‘사과문’이라는 게 대체로 형편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기대 이상이었다. 감독과 동료에게 가혹행위를 당하고 지난 6월 극단적 선택을 한 최숙현 선수. 그를 괴롭혔던 동료 선수가 얼마 전 써서 올린 자필 사과문은 뉘우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술한 변명들로 가득했다.

문장을 곱씹어보자. 우선 ‘뒤통수 한 대’라는 말로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사안을 축소하는 건 ‘거짓 사과문’에 흔히 등장하는 수법이다. ‘때렸다’는 말을 생략한 것도 흥미롭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때렸다는 표현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 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가해자는 그날 자신이 했던 행동을 ‘신체접촉’이라고 표현했다. 접촉은 ‘닿았다’는 뜻이다. ‘퍽’ 소리 날 정도가 아니었음을 넌지시 알린 셈이다. 고인과 유족을 향한 사과문에 감히 신체접촉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는데,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아무래도 매뉴얼이 있는 것 같다. 세간에 떠도는 사과문들을 찾아 읽어보면 유형과 패턴이 거기서 거기다. 책임질 말은 쏙 빼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유형,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본질을 흐리는 유형, ‘잘못한 건 별로 없지만 사과할게요’라고 이야기하는 대인배 유형도 있다.

지난 2018년 12월 16일, 태안화력발전소 운영사인 한국서부발전이 발표한 사과문은 ‘거짓 사과문’의 전형적인 문법을 보여준다. 발전소에서 혼자 밤샘 근무하던 하청업체 계약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지 닷새 만에 나온 사과문이었다.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는 말로 시작되는 글에는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사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대해’ 사죄한다는 건지는 빠져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게 사과문인데, 잘못한 내용은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으니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못을 가리기 위해 치밀하게 단어를 고르고 책임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언어를 비트는 것. 전문 용어로 ‘말장난’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매우 능숙하고 그럴듯하게 해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당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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