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나도 어엿한 이주민 선배… 우리가 나서 후배들 자립 도와야죠”

[우리사회 利주민] 소모뚜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운영위원장

소모뚜(45)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 운영위원장이 한국 땅을 밟은 건 1995년이다. 한글 자모를 겨우 읽던 스무 살 청년은 “한국에서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할 만큼 시간을 보냈다”며 너스레를 떨 만큼 한국어에 유창한 중년이 됐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한국어 실력만이 아니다. 고향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그는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2003년 한국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과 대대적인 강제 출국 조치에 맞선 장기 농성장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또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설립, 이주민들로 구성된 다국적 밴드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down)’ 활동 등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사(史)의 기념비적인 현장마다 빠지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를 10년간 이어갔고,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한국에 있는 미얀마인들을 모아내는 구심점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18일 만난 소모뚜위원장은“한국에 사는 미얀마인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60년 넘게 지속된 군부 독재에 자신감을 잃어버린 고향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인천=주민욱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18일 인천 부평동에 있는 미얀마 식당 ‘브더욱 글로리’에서 만난 그는 “인권의 소중함을 한국에서 배웠다”고 했다. “한국은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낸 나라잖아요.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껴요. 미얀마 군부에 억눌려 주눅 들어 살던 미얀마 사람들도 자유로운 한국에서 살면서 자신감을 되찾곤 해요.”

한국인에게 의존해선 안 돼… 자립이 원칙

소모뚜 위원장은 난민이다. 지금이야 한국을 ‘참 살기 좋은 나라’로 표현하지만 한국 정착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생활하던 소모뚜 위원장은 2004년 난민 신청을 했다. 당시 법무부는 “본국에서 민주화 활동을 소극적으로 했고 귀국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난민 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소송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데 걸린 시간은 7년. 2011년 대법원 상고심까지 끌고 갔던 긴 다툼이었다.

“당시 이주노동계에선 ‘정부에 미운털이 박힌 탓’이라고도 했어요.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폭력 단속을 비판하고 추방 반대 농성에도 참여했거든요. 그래도 밴드와 방송국 활동을 하면서 한국 이주노동자 제도의 불합리한 점을 지속적으로 알려왔습니다.”

지난 25년간 지켜온 그의 철칙은 ‘자립’이다. 불이익을 감수하며 얼굴을 드러내놓고 활동한 이유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에야 ‘노동권’ 개념조차 몰랐으니 한국인 형님, 누나들이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대로 했지만 그건 이미 수십 년 전 일이에요. 이젠 우리가 한국에서 선배가 됐는데 새로 온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만 찾아다니면 부끄러운 일이에요.”

지난해 3월 주한미얀마노동자복지센터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센터는 300명 이상의 미얀마인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된다. 상근 직원 3명도 고용했다. “센터를 세운 건 미얀마인들이 스스로 돕는 ‘자조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죠. 회비와 운영 모든 면에서 자립해야 해요. 저는 운영위원장으로 회의에만 들어가지 실무엔 이제 관여하지 않아요. 제가 활동을 오래 했고, 제도를 잘 안다고 계속 단체를 마음대로 하면 결국 망가지게 됩니다. 실무자들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센터는 1년 반 가까이 순항 중이다. 그간의 경험을 매뉴얼로 녹여낸 게 주효했다. 지금까지 센터의 도움으로 받아낸 체불 임금만 7억원이 넘는다.

“이주노동자도 한국인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소모뚜 위원장도 한국 생활 초기엔 이주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살았다. 한국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살기 위해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만난 은인(恩人)과의 대화 이후 그의 인생 궤적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1998년,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서 열었던 이주민과 함께하는 성탄절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한국인과 개도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어울려 밤새 노래를 부르며 파티를 하는 행사였는데, 문득 ‘왜 이런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웃고 즐길 기회가 없었나 봐요.”

먼저 손을 내민 건 당시 행사를 주최한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의 이란주 대표였다. “그분이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소모뚜, 이주민들도 춤추며 웃을 수 있는 똑같은 사람이란 걸 한국 사람들이 깨닫게 되면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도 분명 달라질 거야.’ 그날 이후로 ‘이주민 인권 운동가’라는 새로운 업(業)이 생긴 거죠.”

그는 한국인 활동가들이 생각하지 못하던 일도 하나씩 이뤄나갔다. ‘이주노동자 퇴직금 지급’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주노동자에겐 퇴직금을 주지 않는 게 관행이었어요. 한국 법률에 1년 이상 일한 모든 노동자가 퇴직금을 받게 돼 있는데, 이주민은 배제돼 있었습니다. 사업주들도 퇴직금을 따로 적립하지 않았고요.”

소모뚜 위원장은 한국인 인권 활동가들에게 처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했고 ‘듣고 보니 당신 말이 맞는다’는 말을 들은 뒤 곧장 고용노동부를 찾았다. 이주노동자의 퇴직금 권리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진정을 냈고, 결국 2004년에 퇴직금을 받아냈다.

비록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지만, 미얀마 민주화 운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는 오는 11월 8일 예정된 미얀마 총선을 위한 재외국민 투표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난달까지 정신없이 보냈다. 그 결과 국내 거주 미얀마인 3분의 1이 투표를 신청했고, 이 가운데 20% 정도가 그의 도움으로 투표 권리를 얻었다. 그는 “미얀마는 정권만 바뀌었을 뿐 사회 곳곳에 군부 세력이 남아있다”며 “민주정권이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소모뚜 위원장은 “다른 나라 출신 이주 노동자들도 자립 센터를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네팔 등 다른 나라 이주민들도 이런 스스로 돕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해요. 우리가 자립해야 한국인도 우리를 더 존중할 테니까요. 언젠간 이주민들이 모여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한국 사람들은 지지만 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인천=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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