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공익추적] “오류투성이 점자 교재로 수능 공부 되겠습니까”

시각장애인단체, EBS 수능 교재 ‘보이콧’
“표 빠지고 수식 틀리고… 맞는 문장 꼽을 정도

수정·재발 방지 요구에 교육부 책임 회피만
” 국특원 “점자 사용 수험생 적다” 황당한 해명

수능 치르는 시각장애 수험생 年 150명 내외
거의 유일한 자료… ‘장애인 학습권’ 보장돼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문제 제기 후 반년이 지나도록 교육부가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달 1일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 정문 앞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모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기본 점자 표기도 엉망이고 표나 수식, 그림이 통째로 빠진 곳도 많아요. 이 교재로 공부하면 틀린 내용을 외우게 되거나 가독성이 떨어져 오히려 공부에 방해될 정도입니다. 비장애인용 수능 교재가 이렇게 나왔다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각장애인단체가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제작된 EBS 점자 교재를 ‘보이콧’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문제가 된 교재는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에 응시하는 장애 학생의 학습을 돕기 위해 개발된 ‘시각장애인용 EBS 수능방송 대체 자료’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이하 ‘한시련’)는 지난 3월 보급된 수능 점자 자료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교육부에 문제 제기를 했다. 수정 요청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시련 측은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4차례 공식 성명서를 내고 수능 점자 교재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들은 “대체 자료가 장애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기는커녕 인권을 짓밟고 있다”면서 “교육부는 자료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고 관계자를 징계하라”며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단체 “표와 수식은 통째로 빠지고 오탈자 반복… 엉터리 교재”

EBS는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특수교육원(이하 ‘국특원’)에 의뢰해 매년 점자와 음성으로 이뤄진 ‘시각장애인용 EBS 수능방송 대체 자료’를 제작하고 있다. 한시련이 2019년 수능 대비 EBS 대체 자료 발간 직후 점자와 음성 자료에 대한 검수를 각각 진행한 결과, 특히 점자 자료에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오류가 발견됐다. ▲’표·그림 참조’라고 써놓고 표나 그림이 없는 경우 ▲수식에 괄호 등 특수문자가 잘못 기재된 경우 ▲가운뎃점이나 마침표가 빠지거나 잘못 삽입된 경우 등이 대표적이다. 손으로 더듬어가며 내용을 파악하는 점자의 특성상 표기법이 틀리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연주 한시련 정책팀장은 “제대로 된 문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료 전체가 오류투성이인 ‘엉터리 교재’였다”면서 “아이들이 보는 교재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참담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EBS 대체 자료는 유일한 참고서다. 비장애 학생들이 시중의 여러 참고서를 비교한 뒤 난이도나 디자인까지 고려해 자신에게 맞는 교재를 선택하는 것과 대비된다. 시각장애인 단체가 EBS 대체 자료 문제를 심각한 학습권 침해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연주 팀장은 “EBS 대체 자료는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유일한 끈과 같다”면서 “대다수 학생이 이 자료 하나에 의지해 수능을 준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BS 대체 자료에 대한 불만은 수년 전부터 있어왔다. 자료 발간 시기를 두고 한시련과 교육부는 오랫동안 마찰을 빚어왔다. 국특원은 지난해까지 매년 6월경 EBS 대체 자료를 발간했다. 수능을 5개월여 앞두고 자료를 내놨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편함이 컸다. 한시련은 발간 시기를 매년 1월로 앞당겨 달라고 수년간 요구해왔고, 올해 처음으로 3월에 자료가 발간됐다. 한시련 측은 “지난 4월 대체 자료의 품질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의견서를 국특원에 제출했고, 이후에도 수차례 성명서와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자료 전면 수정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는데도 교육부와 국특원 측은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점자 교재? 보는 학생들도 별로 없는데…” 국립특수교육원 황당 해명 내놔

올해 EBS 대체 자료를 제작한 업체는 넥스트이노베이션이다.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권 향상을 위한 설루션 개발을 미션으로 내걸고 지난 2015년 설립된 소셜벤처다. 넥스트이노베이션 측은 “제작과 수정은 국특원 지침대로 진행했다”면서 “자료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교육부로부터 전달받은 시기가 지난 6월 말경인데, 7월 중순에 수정해 다시 자료를 올렸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시련은 “수정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수정”이라고 반박했다.

더나은미래는 지난 17일 엉터리 점자 교재를 발주하고 감수한 국특원 측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국특원 대체 자료 제작 담당자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사실상 점자 자료보다 음성 자료를 주로 이용한다”는 엉뚱한 해명을 내놨다. 또 “한시련 측이 주장하는 오류들은 대부분 편집 스타일 호불호에 따른 지적이라고 판단되므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만약 문제 되는 부분이 있다면 제작 업체가 경험이 부족해 제대로 못 만든 탓”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특원의 해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점자 사용자인 오윤진 세종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점자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읽히는 언어”라며 “특수교육을 전담하는 정부기관이 점자 표기 오류에 대해 편집 스타일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점자 자료를 활용하는 학생이 적다는 해명에 대해서도 “지문이 긴 언어·외국어나 복잡한 공식이 나오는 수리·과학 등 점자 자료가 꼭 필요한 과목이 많다”며 “제대로 된 점자 자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음성 자료에 의존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시련 측도 “국특원과 교육부가 책임 회피에 나서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매년 수능에 응시하는 시각장애인 수험생이 많아야 150명 정도라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장애인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정부기관이 ‘수가 적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또한 “자료 제작 최종 책임자는 국특원과 교육부”라며 “국특원 주장대로 선정 업체가 자격 미달이라면 그 역시 큰 문제이니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감사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 제품 품질 논란은 오래된 문제… 장애인 목소리 반영해야

장애인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나 보조 기기가 장애인들에게 외면받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윤진 교수는 “시각장애인용 노트북으로 불리는 점자정보단말기나 화면 확대 소프트웨어, 스마트워치 등 보조 기기 전반에 대한 당사자들의 불만이 크다”며 “‘내가 장애인이라 제품도 장애가 있는 것만 주느냐’고 하소연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의 불만이 계속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장애인 제품 제작에 투입되는 정부의 예산이 적기 때문이다. EBS 대체 자료와 같은 학습 자료는 교육부 예산으로 국립특수교육원이 제작하고, 보조기기는 보건복지부·건강보험공단·한국장애인고용공단·한국정보화진흥원 등의 예산으로 개별 업체가 제작한다. 이번 EBS 대체 자료의 경우 제작에 배정된 예산은 약 1억원. 대체 자료 제작 경험이 풍부한 기존 업체들조차 입찰을 포기했을 정도로 적은 액수다. 보조 기기 쪽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승민 국립재활원 중앙보조기기센터 팀장에 따르면 전체 장애인 보조 기기 지원금액이 지난해 기준 3200억원이다. 정 팀장은 “다양한 업체가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시장에 뛰어들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며, 품목당 단가도 10년 가까이 동결된 상황”이라면서 “장애인 보조 기기나 서비스 관련 예산을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김동기 목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들이 제품 및 서비스 개발에 참여하거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나 시스템이 현재로선 거의 없다”면서 “장애인들의 사용 후기나 평가를 모아 업체에 전달할 수 있는 ‘부처통합 사후관리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품질 개선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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