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길 링크 한국지부장 인터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았다.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노 딜(no deal)’ 정상회담 이후 얼어붙었던 미북 관계에 다시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개성공단 재가동 카드를 꺼내 들면서 남북 관계의 경색 국면을 풀어보겠다고 나섰다.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66년간 지속한 강 대 강 대결 구도에 균열이 생긴 지금을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기회로 여기고 있다. 장마당 세대는 북한판 ‘밀레니얼 세대’다. 1990년대 태어나 ‘고난의 행군’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현재 북한 체제를 이끄는 주역으로 평가된다. 국가 배급망에 의존하지 않고, 시장경제 안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 삶을 꾸리는 데 익숙하다. 북한을 벗어나 중국을 거쳐 한국과 미국으로 떠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장마당 세대의 도전을 돕는 단체가 있다. 국제 비영리단체 링크(LiNK·Liberty in North Korea)는 지난 2004년부터 1000명이 넘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지원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소셜미디어로 알렸다. 재미교포들의 주도로 세워져 현재 미국과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최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만난 박석길(35) 링크 한국지부장은 “북한 사회의 변화는 권력을 쥔 위로부터가 아니라 희망을 갈구하는 아래로부터 이뤄지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은 감시와 억압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지만, 장마당 세대는 그 속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말했다.
‘자괴감’부터 느끼는 탈북자들에게 용기 심어주는 일 중요해
박 지부장은 한국계 영국인이다. 런던 정경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밟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이후 링크 미국본부에서 근무했고 2015년부터는 한국지부장을 맡아 중국·동남아 등을 오가며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도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링크가 지금까지 1000명이 넘는 북한 주민을 구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유를 원하는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바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링크는 ‘탈북 난민’과의 협력과 연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들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마음껏 내는 것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편협한 인식을 바꾸는 길이라고 믿는다. 링크는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체류하면서 북송돼 고문당하고 강제노동을 하게 될 위험에 노출된 탈북자들을 한국이나 미국으로 안전하게 보내주는 일을 한다. 한국과 미국 가운데 어디에 정착하고 싶은지 선택권을 준다. 이 가운데 99%는 한국을 선택하지만, 대부분 입국하자마자 충격을 받는다.”
―자유를 찾았는데 왜 충격을 느끼는 것인가.
“탈북자들이 인천국제공항을 처음 보면 ‘대체 이게 뭐지?’ 하는 생각부터 한다고 한다. 규모에 압도되는 것이다. ‘남조선 사람들이 이런 것을 만들 때 우리는 대체 뭘 했나’하며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도 많다. 북한의 경제난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면서 괴로워한다. 우리는 북한이 낙후한 것이 결코 주민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려준다. 탈북해서 한국까지 온 것 자체가 성공이고, 앞으로 각자 가진 잠재력을 발휘해서 잘 살아갈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한국행을 선택한 북한 주민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한국 정부가 물질적인 지원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링크는 주로 심리적인 안정을 돕는 활동에 집중한다. 북한과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감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 탈북자와 활동가가 일대일로 결연 맺어 사회화를 돕고 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는 ‘체인지 메이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청년들은 한국 사회 적응이 빠른 편이다.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데 집중한다.”
탈북 선택한 장마당 세대, ‘희생자’ 아닌 ‘혁명가’
링크는 장마당 세대를 북한 내부에 새 바람을 일으킬 주체로 보고 있다. “변화의 동력은 사람에서 나온다”는 것이 박 대표의 생각이다. 박 대표는 “북한을 떠나 한국과 미국을 찾은 탈북 청년들은 체제의 희생양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을 감행한 혁명가들”이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 구출·정착 지원 외에 소셜미디어로 홍보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북한이 대체 어떤 나라인지, 북한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다. 아직도 북한을 바라보는 세계의 프레임은 좁기만 하다. ‘김정은’ ‘안보’ ‘핵’ 같은 이야기만 한다. 전쟁 위협만 부각하는 것은 북한을 오해하게 한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북한 사람과 북한 문화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 수 있다.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탈북자의 입으로 북한을 들려주는 ‘장마당 세대’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박 대표가 2017년 제작한 ‘장마당 세대’는 20~30대 탈북 청년 10명의 사연으로 채운 5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다. 생필품부터 한국 드라마까지 온갖 상품이 거래되는 북한의 시장 ‘장마당’이 생활 터전이었던 북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장마당 세대’를 두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데 익숙한 용감한 세대의 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장마당 세대’는 북한 청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북한을 다룬 기존 다큐멘터리는 철저하게 ‘미국인’의 시선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어도 못하고 북한에 가본 적도 없는 전직 정부 관료, 군인, 교수 등이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다’고 말했다. 북한의 속사정은 북한 출신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어야 정확하다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될 때만 해도 장마당 세대를 주목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7년 전쯤 ‘The Jangmadang Generation’(장마당 세대)을 구글에 입력했더니 검색 결과가 2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북한은 변화하고 있고, 장마당 세대가 이것을 주도하고 있는데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장마당 세대는 ‘북한이 이만큼 달라졌다’고 선언하는 작품이다. 북한의 청년들이 억압 속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한 외신 기자는 ‘북한 청년들이 친구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북한 사람도 우리와 똑같다.”
―한국에도 북한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을 가진 청년들이 있다. 남북 관계가 급변하고 있는데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나.
“북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적’이라고 생각하면 최악이고, ‘너무 불쌍하고 안됐다’고 생각하면 차악이다. 최선은 환경이 다를 뿐 가능성을 가진 똑같은 사람, 도와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싶은 동반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 어디서든 청년들이 변화를 만들고 있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와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동반자다.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남북한 청년들이 공유할 수 있다면 환상적일 것이다.”
[손지연 청년기자(청세담 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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