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선 그라운드X 대표 인터뷰
유엔, 기아 문제 해결에 블록체인 활용
자금 탈취·유용할 수 없어 현장에 도움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 출시
사용자 SNS 활동, ‘토큰’으로 보상
‘디지털 재산권’ 보장 시대 열릴 것
가수의 노래가 담긴 ‘CD’는 중고로 사고팔면서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한 ‘음원’은 왜 다른 사람에게 되팔 수 없는 걸까? 돈 내고 전자책을 다운받았는데 서비스하던 회사가 망해 책이 날아갔다면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할까?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석연치 않지만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는 보장받을 길 없는 개인의 권리들. 이를 통칭 ‘디지털 재산(Digital Property)’이라고 부른다.
카카오(Kakao)의 블록체인 기술 계열사인 ‘그라운드X’의 한재선(47) 대표는 “블록체인 안에서는 이런 문제가 해소된다”고 말했다. 기존의 디지털 시스템에서는 데이터를 쉽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유권을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블록체인에서는 소유권이 명확해진다. 블록체인 데이터는 복제가 불가능하며 사고파는 모든 과정이 장부에 투명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재산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라운드X는 지난 9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블록체인 포 소셜 임팩트 콘퍼런스(Blockchain for Social Impact Conference)’를 개최했다. 블록체인이 기부, 공정 무역, 난민 지원 등에 활용된 사례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테헤란로에 있는 그라운드X 본사에서 만난 한재선 대표는 “블록체인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 불공정과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공익적 기술”이라며 “특히 디지털 재산권 보장은 블록체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람’을 품은 기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블록체인 포 소셜 임팩트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블록체인 기술의 사회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탈중앙화, 투명성, 불변성, 추적가능성 등 블록체인의 모든 특성이 ‘공익’이라는 분야와 딱 맞아떨어진다. 사회문제를 푸는 일에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블록체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다. 블록체인 하면 코인이나 투기부터 떠올린다. 블록체인이 유용한 기술이라는 걸 알리는 게 우리의 숙제다. 그래서 콘퍼런스도 열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사회문제 해결에 시너지를 낸 구체적 사례가 있다면.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올 초 파키스탄에서 진행한 ‘빌딩 블록(Building Blocks)’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취약 계층 가족이 음식과 현금을 지원받은 내역을 스마트폰을 통해 블록체인에 인증하고 기록하게 한 것이다. 실제로 취약 계층이나 난민을 지원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곤 했다. 중간에 탈취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식료품을 사라고 준 돈을 다른 데 써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특히 난민캠프 같은 데선 심각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블록체인에선 모든 게 투명하게 트래킹되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다. 블록체인 기술이 유엔 산하 원조 단체 전체로 확대된다면 유실되는 부분 없이 효율적으로 자금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재선 대표는 블록체인보다는 빅데이터 전문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카이스트(KAIST)에서 분산시스템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2007년 대용량 데이터 분산 처리 업체인 ‘넥스알’을 설립해 회사를 키웠다. 2014년부터는 기술 스타트업 전문 투자회사인 ‘퓨처플레이’에서 CTO(최고기술책임자)로 일했다. 블록체인 기술 회사인 그라운드X를 설립한 건 지난해 3월이다.
―원래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
“퓨처플레이에 있을 때 기술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소셜벤처들에 투자를 했었다. 수동 휠체어를 전동 휠체어로 바꿔주는 제품을 개발하는 소셜벤처 ‘토도웍스’가 대표적이다. 영리를 추구하면서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코이카(KOICA)의 CTS 프로그램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계기가 됐다. 혁신적 기술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를 돕는 소셜벤처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때부터 좀 더 글로벌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빅데이터를 하다 블록체인으로 넘어온 이유는?
“전공인 분산시스템 안에도 빅데이터·인공지능(AI)뿐 아니라 블록체인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생각을 갖게 된 건 2017년부터다. 단순히 불편함을 없애주는 정도의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이 뭘까 고민을 하다 블록체인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했다. 빅데이터와 AI에는 없는 요소를 블록체인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사람’이다.”
―블록체인 기술 안에 ‘사람’이 있다?
“블록체인의 기본 철학이 ‘참여’다. 사람들의 참여. 그게 모여서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게 블록체인의 힘이다. 그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블록체인으로 세상 사람들의 참여를 일으키고, 참여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는 선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것이다. 그라운드X를 만들 때도 처음부터 ‘소셜 임팩트’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단순히 돈만 버는 사업은 하지 말자. 소셜 임팩트를 낼 수 있는 일을 하자. 직원들과 늘 이야기한다.”
디지털 재산권, 개인의 마땅한 권리
그라운드X는 지난 6월 자체 개발한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Klaytn)’을 선보였다.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고 전문적인 기술로 손꼽히는 블록체인을 일반 사용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 플랫폼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재선 대표는 “클레이튼은 스마트폰의 안드로이드나 iOS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블록체인 운영체제”라고 설명했다. 사용 방법도 간단하다. 스마트폰 앱스토어에서 원하는 ‘비앱'(BApp·블록체인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쓰면 된다.
―클레이튼으로 ‘블록체인의 대중화’를 선언한 셈인데.
“블록체인의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쉬워야 한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블록체인은 너무 어려웠다. 개발자인 나도 블록체인으로 뭘 하려면 며칠 동안 끙끙대야 했다. 그래서 최대한 쉽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을 쓸 때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블록체인 플랫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중이 모르게 하고 싶다. 그냥 플랫폼 위에 차려진 서비스를 편안하게 이용하면 된다.”
―이미 좋은 앱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비앱’에 매력을 느낄까?
“결국 ‘개인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가 대중화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재산’을 강조하는 거다. 우리는 지금 페이스북에 정보(데이터)를 무료로 주고 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도 하고 댓글도 달고 광고도 보지만 보상은 없다. 서비스를 사용하는 대가로 정보를 그냥 주는 게 20년 전에는 당연한 얘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서비스가 넘쳐나는 시대니까. 블록체인 플랫폼에서는 개인이 들인 시간과 노력을 ‘토큰’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클레이튼에도 그런 서비스가 장착됐나?
“블록체인판 인스타그램으로 불리는 ‘피블(PIBBLE)’이라는 비앱이 대표적이다. 사용자가 SNS를 하면서 이미지를 올리거나 광고를 보면 활동에 따라 토큰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음악, 뷰티, 웹툰 등 다양한 비앱이 서비스된다.”
한재선 대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비앱을 우선적으로 서비스하기 위해 파트너를 깐깐하게 고르고 있다”고 했다. 비앱 서비스를 하겠다고 지원한 3000여 개의 기업 가운데 300여 개 기업을 골라 심층 미팅을 진행했고, 이 중 51개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도박성이나 투기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업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블록체인은 공정성과 투명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가장 잘 맞는 기술”이라며 “블록체인의 대중화를 통해 모든 개인이 자신의 권리와 가치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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