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안심마을’ 이야기
유아 때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한 마을에서 평생을 보낼 수 있어
모임·협동조합 등 단체만 30여 개 작년 전국서 2000명 견학 다녀가
마을서 자란 아이, 성인이 돼 취업까지 배달·판매·보육 등 다양한 업무 종사
‘장애’ 아닌 ‘사람’을 알아가며 살죠
‘느린배송-언젠간 가겠지’. 대구 동구 안심1동에 있는 로컬푸드 마켓 ‘땅과사람이야기’가 운영하는 배달 서비스의 이름이다. 총알 배송, 빠른 배송을 강조하는 여느 배달 서비스와 달리 대놓고 느린 배송을 광고하는 이유가 있다.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걸어서 상품을 배달하기 때문이다. 비록 빨리 가진 못해도 세 배달 직원 모두가 동네 지리에 훤한 토박이라 기다리면 반드시 받게 된다는 깊은 뜻이 담긴 이름이다.
‘안심마을’로 불리는 안심1동 인근 지역에서는 일하는 발달장애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마을 안에서만 발달장애인 27명이 반찬 가게 판매직원, 어린이집 보육 교사, 도서관 청소 직원 등으로 근무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마을공동체’로 소문이 나면서 지난해 전국 각지에서 2000여 명이 견학을 왔다. “비법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그런 게 따로 있나요? 함께 보낸 시간이 비법이라면 비법이죠.” 지난 12일 안심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이 말했다.
발달장애인의 교육·치료·취업을 한 마을에서… 30여 단체가 공동체 형성
안심마을에서는 아동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장애인이 마을에서 교육과 치료를 받고, 취미 활동을 즐기고, 취업해서 일을 하며 살아간다. 발달장애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사회적 활동을 하기까지의 전 생애를 마을 안에서 보낼 수 있는 구조다. 미취학 아동은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 다니는 통합 어린이집인 ‘한사랑어린이집’에 다니고, 초·중·고등학생은 마을 엄마·아빠들이 만든 ‘방과후학교 둥지’에서 놀이나 체험 활동을 한다. 성인들은 ‘한사랑주간지원센터’나 ‘자립지원센터’ 등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발달장애인들은 마을 안에 있는 가게나 센터 등에서 일할 기회를 얻는다. 악기 연주, 낚시와 같은 마을 동아리 활동에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다. 안심1동에 흩어져 있는 30여 단체를 중심으로 이 같은 마을공동체가 촘촘하게 형성돼 있다.
안심마을의 시작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장애 아동 전문 보육 기관인 한사랑어린이집이 이곳에 문을 열었다. 윤문주 한사랑어린이집 원장은 “처음엔 장애인 시설이라고 꺼리는 주민들이 많아 어려움이 컸다”고 떠올렸다. “어린이집으로 주민들을 초대해 축제도 하고, 학부모들과 함께 마을 홀몸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몇 년을 노력했어요.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죠. 우리 아이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그냥 가져오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그럴 때도 가게 주인들이 아이들한테 화내지 않고 어린이집으로 전화해 알려줘요. 장애 아이들이 이렇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동네는 전국에 몇 군데 안 될 겁니다.”
한사랑어린이집은 2005년 비장애 아동도 다닐 수 있는 ‘장애아 통합 어린이집’으로 전환됐다. 대개는 비장애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장애 아이들이 들어오면서 통합 어린이집이 되는데 이곳은 반대로 전환된 케이스다. 현재 60명 정원에 장애 아동이 36명, 비장애 아동이 24명이다. 윤문주 원장은 “통합 어린이집 중에 장애 아동이 더 많은 곳은 전국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 가족과 비장애인 가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면서 안심마을은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사랑어린이집 출신 학부모들이 뜻을 모아 2008년 어린이 도서관인 ‘아띠도서관’을 만든 일이 대표적이다. 김용숙 아띠도서관 사무국장은 “우리 동네에 어린이 도서관이 없으니 엄마·아빠들이 직접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나왔다”면서 “돈도 없었는데 무모하게 밀어붙였다”며 웃었다. “후원의 밤과 바자회를 통해 600만원을 벌어 공간부터 마련했어요. 내부 공사할 돈이 없어서 우리가 직접 바닥도 깔고 전기도 연결했죠.” 아띠도서관을 시작으로 유기농 마켓, 반찬 가게, 책방 등 필요한 공간을 직접 만드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시설 들어설 때면 장애인 부모보다 마을 주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협동조합 ‘공터’가 만든 4층짜리 건물은 안심마을의 랜드마크다. 장애인 지원 단체들에 임대료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마을 주민 30여 명이 출자해 지난 2014년 만든 건물이다. 발달장애인 치료센터인 ‘마을애’, 돌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사랑주간보호센터’ 등 안심마을에서 활동하는 6개 장애인 단체가 이 건물에 입주해 있다.
‘마을공작소 와글’을 운영하는 이형배 대표는 “공터를 만들면서 우리 마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고 말했다. “처음 이 공간을 마련할 땐 ‘집값 떨어진다’며 반발하는 주민들이 일부 있었어요. 그때 마을 주민들이 장애인 가족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곳인데 부끄러운 줄 아시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항의하고 나섰어요. 덕분에 문제를 해결했죠. 장애인 가족들만 추진한 일이었다면 우리도 다른 지역 장애인 부모들처럼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 겁니다.” 이 대표의 열 살짜리 둘째 아들도 발달장애인이다.
발달장애인들도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30대 발달장애인 청년들은 지난 2015년 ‘발달장애인 당사자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발달장애인 청년의 연애나 주거 등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발달장애인대회에 참여하고 있는 20대 여성 A씨는 “이 마을엔 친구들도 많고 다들 제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면서 “지금은 이사 가서 다른 동네에 살지만 안심마을에 자주 온다”며 웃었다.
이형배 대표는 “비장애인은 ‘장애’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심마을 사람들이 성격이 느긋해서 ‘느린배송’을 참아주는 게 아니에요. 자주 보고 같이 밥을 먹고 일도 하면서 배달 직원들에 대해 잘 알게 됐기 때문이죠. 함께 어울려 살아온 30여 년 세월이 우리 마을 공동체의 자랑입니다.”
[대구=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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