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출발점, 주류였던 ‘비영리 조직’
5년 만에 대세 뒤집혀… 10년 차 4분의 1 이하
인증 규모 35배 늘었는데, 비영리는 뒤처져
재능 기부 방식으로 사회 취약 계층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는 ‘바라봄사진관’은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비즈니스 분야에서 20년 넘게 경력을 쌓은 나종민 바라봄사진관 대표는 ‘영리하게 비영리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다. 나 대표는 영리한 비영리 활동을 위해 ‘투 트랙(two track)’ 전략을 짰다. ▲사회적기업, 비영리 단체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단체 사진이나 행사 사진을 촬영하는 영리 사업과 ▲장애인, 저소득 노인들의 사진을 무료로 촬영하는 비영리 사업을 병행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비영리 조직은 선뜻 비즈니스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비영리가 영리 활동을 해도 될까’ ‘역량도 없는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나종민 대표는 “재정 상황이 열악한 풀뿌리 비영리 단체들은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만, 막상 비즈니스에 나서겠다는 곳은 드물다”고 했다.
사회적기업 생태계 내 비영리 조직, 2007년 47%에서 2017년 23%로 줄어
비영리 조직이 비즈니스를 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내 초창기 ‘소셜 비즈니스’ 생태계를 주도했던 건 비영리 조직이었다. 정부가 사회적기업 육성에 시동을 건 2007년, 비영리 조직은 ‘인증 사회적기업’의 절반 가까운 수를 차지하며 사회적경제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조영복 부산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회적기업 자체가 비영리 조직을 주축으로 한 정부의 일자리 복지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IMF 이후 심각해진 취약 계층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00년대 들어 사회적 일자리 사업, 자활 사업을 시작했고, 이런 사업으로 창출된 일자리를 더욱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시키는 방안으로 사회적기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국내 1호 인증 사회적기업인 ‘다솜이재단’이다. 다솜이재단은 2004년 교보생명과 실업극복재단(현 함께일하는재단)이 함께 설립한 기관으로, ‘소셜 미션’이 뚜렷한 비영리 조직과 ‘비즈니스’ 역량이 있는 기업이 협력한 ‘기업 연계형 사회적 일자리 사업’ 사례 중 하나다. 목표는 취약 계층 여성을 고용해 전문 간병인으로 양성하고, 공급이 부족한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사회적기업 육성법 제1조에 명시된 ‘사회에서 충분하게 공급되지 못하는 사회 서비스를 확충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이란 사회적기업의 목적에 꼭 들어맞는다. 이처럼 사회적기업 인증제가 도입되면서 기존에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나 자활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비영리 조직 중 상당수가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아 어엿한 ‘기업’이 됐다.
2007년 고용노동부에서 첫 인증을 받은 사회적기업은 51개였고, 이 중 사단법인·재단법인·사회복지법인·비영리 민간단체 등 비영리 조직이 24개로 47.1%에 달했다. 이후로도 비영리 조직은 전체 사회적기업 규모에서 절반을 차지하며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대세가 뒤집힌 건 2012년이다. 전체 751개 사회적기업 가운데 비영리가 352개, 유한회사·주식회사 등 상법상 회사가 367개를 차지하며 처음으로 비영리가 뒤처졌다.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상법상 회사의 가파른 증가세를 비영리 조직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은 상법상 회사 수가 해마다 200개 늘어나고 있지만, 비영리 조직 수는 눈에 띄는 증가 없이 400개를 약간 웃도는 수준에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2017년 기준 국내 인증 사회적기업 1825개 중 절반을 훌쩍 넘는 1135개(62.2%)가 상법상 회사다. 비영리 조직은 432개(23.7%)로 상법상 회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비즈니스 역량 떨어지는 비영리 조직… 시장 경쟁에서 밀려
왜 이런 역전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사회 서비스 제공’과 ‘취약 계층 일자리 창출’에서 출발한 사회적기업 생태계에서 점차 ‘비즈니스’ 역량이 강조되기 시작한 게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신경철 사회적기업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장은 “이전까지는 사회적기업을 ‘사회복지’ 영역으로 여겼지만, 점차 ‘경영·경제’ 영역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그러면서 ‘사회적’이라는 글자보다는 ‘기업’에 방점이 찍히게 됐다”고 했다. 즉 비영리 조직의 비즈니스 역량이 부족한 탓에 사회적경제 중심에서 밀려나게 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조직 내부에 사업 경험과 감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비영리가 영리에 나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그러다보니 사회적경제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다. 장애인 작업재활시설에서 출발해 연 매출 9억원대의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한 ‘누야하우스’도 사업 초기 이러한 이유로 운영난에 시달렸다. 사업 경험이 전혀 없는 사회복지사, 장애인 직업재활사들로 운영진이 꾸려진 탓이다. 이금복 누야하우스 대표는 “운영진들이 각자 업무 시간을 쪼개 미니 MBA 과정, 비즈니스 강좌 등을 수강하며 비즈니스 역량을 쌓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신 센터장은 “비영리 조직 구성원은 대부분 사회복지나 시민사회 영역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라며 “비즈니스와 마케팅 분야 전문 인력 중심의 상법상 회사보다 비즈니스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회적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것도 비영리 조직에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조상미 이화여대 사회적경제협동과정 주임교수는 “시장 경쟁에서 미션은 확고하나 비즈니스가 약한 비영리 조직보다는, 미션은 약해도 확실한 수익 모델이 있는 상법상 회사가 생존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즈니스 마인드 원천 봉쇄하는 ‘비영리 마인드’
‘영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비영리 조직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적기업 생태계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것도 사회적기업 생태계에서 비영리 조직 규모가 성장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노연희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비영리 조직들로서는 영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미션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에 소셜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곳이 여전히 많다”며 “특히 국내 대형 모금 단체들은 ‘우리는 비영리’라는 생각이 강해서 수익 사업을 한다는 데 거부감이 강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더나은미래 취재 과정에서도 조직 내부에 사회적경제 전담팀을 꾸린 A단체, 사회적경제 모델 도입 논의를 진행 중인 B단체 등이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언론에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비영리 조직은 정부 지원금을 받아 사업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별도 수익 사업을 하는 데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영복 교수는 “비영리 조직들은 사회복지 서비스 등 정부의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입장에서 직접 돈을 벌기보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서 비영리 사업을 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정부 재정은 한정돼 있고 사회 문제는 계속 늘어나는 만큼 비영리 조직들도 직접 돈을 벌어 사업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비영리 영역 내부에서 소셜 비즈니스를 둘러싼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비영리가 영리를 하는 것이 맞느냐, 소셜 비즈니스를 해도 되느냐에 대해 조직 내부에서 논의한다거나 조직 나름의 논리를 세울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조성이 안 됐다”며 “앞으로 조직 내에서 이러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야 비영리가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영리, 비즈니스 실험은 꾸준히 그리고 신중하게
전문가들은 비영리 조직이 소셜 비즈니스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기존 비영리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늘어나는 상황에 맞춰 새로운 설루션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복 교수는 “환경오염 문제, 고령화 문제 등 우리 사회에서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들은 정부 자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며 “비영리 조직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해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때 사회 서비스 전반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비영리 조직들의 소셜 비즈니스 실험이 비영리 영역 전반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조상미 교수는 “비영리 영역은 비즈니스 영역처럼 경쟁하거나 성과를 중시하지 않다 보니 비영리 조직들이 다소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영리 조직들이 비즈니스 경험을 통해 치열하게 생존을 고민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혁신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황신애 이사는 “공익상품 연계형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하는 비영리 조직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면서 “공익 상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비영리 사업을 하는 이런 모델은 비영리 조직들이 소셜 비즈니스 경험을 쌓는 첫 단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영리 조직의 구성원들의 비즈니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당장은 완성도 높고 잘 팔릴 만한 상품을 만들 역량이 부족하겠지만, 조금씩 경험하면서 차근차근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한승희 더나은미래 기자 hee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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