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책임투자 전문가에게 묻다
‘반쪽짜리 개혁’.
최근 도입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두고 하는 말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주주권 행사 지침을 가리킨다. 주인을 대신해 집안의 자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국민연금이나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가 고객(국민)의 돈을 충실하게 관리하기 위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번에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어 비판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이 기업 임원을 선임·해임하거나, 정관 변경을 하는 등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져 제대로 된 기업 견제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올해 CSR 분야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스튜어드십 코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더나은미래가 경제 및 사회책임투자 전문가 4인에게 물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위해 경영권 참여는 필수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0일 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운용위)를 열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최종안을 심의·의결해 곧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 기금 운용에 관한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정부·재계·근로자·연구기관 등 각계를 대표하는 전문가 20명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라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국내 주요 기업 299개가 영향을 받게 됐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주식에 131조5000억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이는 코스피·코스닥 시가총액의 7%가량이다.
문제는 재계의 경영권 간섭 시비를 의식해 국민연금이 ‘경영권 참여 주주권’에 해당하는 ▲이사 선임·해임 ▲감사 추천 ▲정관 변경 제안 등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다만 노동계의 반발을 고려한 듯 기금운용위가 의결한 경우에는 경영권 참여 주주권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와 노동계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쪽에선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자체는 환영한다”면서도 “경영권 참여 없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힘들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대는 논평을 통해 “스튜어드십 코드가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사 및 감사후보 추천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다.
박상인(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와 별개로 주주총회에서 회사에 손실을 끼친 임원을 해임하고 경영진을 견제할 사외이사 선임하는 일은 주주의 당연한 의무”라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례와 같은 계열사 간 부당 합병 등에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강력한 장치가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가 효과성을 가지려면 법적·제도적 토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 제약 사례가 경영권 찬탈 방지를 위한 ‘5%룰’이다. 5%룰은 상장사 지분을 5% 이상 가진 투자자는 지분이 1% 이상 변동될 경우 5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한 자본시장법상 규정을 말한다. 이 사무국장은 “5%룰은 과도한 경영 참여나 인수합병 등 투기자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인데, 현재 증권거래법상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기금도 ‘5%룰’이 적용된다”면서 “주로 장기 투자를 하는 국민연금에 이 룰을 적용하는 건 과도한 규제”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에 이 규제를 풀어주면 투자가 원활해지고, 이를 통해 기업에 더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현재 금융위원회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투자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바꾸더라도 ‘5%룰’을 적용받지 않도록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의결권, 외부에 넘겨야” VS. “내부 위원회가 맡아야”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을 주도한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먼저 도입한 미국 등에선 오히려 스튜어드십 코드가 외부 압력을 막아주는 등 기업 경영의 독립성을 지켜준다고 여긴다”고 주장했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근본적으로는 기업의 리스크를 줄여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탁자의 책임’ 역할을 해 경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것. 조 원장은 “반면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연금 사회주의’라는 공격을 받는 등 본래 취지와 달리 진영 논리에 따라 잘못 해석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앞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후생노동성이 공적연금을 통제하면서도 주주권·의결권 행사 부분은 외부 민간 운용사에 100% 위탁하고 있다.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국민연금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함께 위탁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민간 운용사에 위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독립성을 담보하고 전문성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민간 자산운용사로 의결권을 위탁하는 게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의결권을 위임받을 국내 자산운용사 대부분이 스튜어드십 코드 대상 기업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공정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외부의 민간 운용사에 의결권을 넘기지 말고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민연금 내부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맡겨야 한다”면서 “민간 의결권 자문 기관(현재 한국지배구조원) 수를 늘려 전문성을 보완하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조명현 원장은 “내부 민간위원회에 의결권을 맡겨도 국민연금이 완전히 독립성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외부에 위탁하되 위탁 운용사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고 조달 선정과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게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도움말=(이름 가나다순)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위원장,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