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b 운동 15주년… 통역 자원봉사자 4500명의 힘
이어령 전 장관, “AI 시대, 감성과 문화의 힘 길러야”
“bbb 자원봉사자들은 통역 봉사를 위해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에게 기꺼이 제공한다. 새벽 문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외국 사람들은 개인의 사생활(Privacy)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이 bbb 자원봉사자들처럼 통역 봉사를 할 수 있을까. 난 부정적이다.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더불어사는 문화’ 덕분에 bbb 운동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어령(83) 초대 문화부 장관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사단법인 ‘비비비(bbb)코리아’ 주최로 열린 ‘bbb 컨퍼런스’에서 이 같이 말했다. 그는 “모든 외부 강연을 거절하고 있지만, bbb의 15주년 기념행사여서 성치 않은 몸임에도 연단에 섰다”며 “bbb 운동이 15년이나 이어질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운을 뗐다.
‘bbb운동’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언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됐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디지털 기술과 통역 자원봉사자들을 연결하는 모델로, 이어령 전 장관의 아디이어가 발단이 됐다. ‘bbb(before babel brigade)’는 언어의 벽을 넘어 인류가 하나가 되자는 뜻을 담은 말이다. 현재 45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19개국 언어 통역서비스에 참여하고 있다.
언론인, 교수, 평론가를 거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전 장관은, 인공지능(AI)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개념들을 이미 오래전 거론했던 사람이다. 그가 16년 전 현역 교수로 했던 마지막 이화여대 강의가 ‘한국인과 정보사회’였다. 이 강의에서 그는 인공지능, 정보화 네트워크 등이 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날 기조강연에서 이어령 전 장관은 “번역이야 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세심하게 파악하고 전달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정이 없는 기계는 해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주제발표 시간에는 이정수 집단지성 번역 기업 ‘플리토’ 대표와 김준석 네이버 파파고 대표 등이 참석해 기술 발달에 따른 소통을 주제로 토론을 이어나갔다.
이날 행사에는 유장희 비비비(bbb) 코리아 회장, 이희범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 유진룡 국민대 석좌교수를 비롯해 자원봉사자 4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장희 비비비(bbb )코리아 회장은 “bbb 컨퍼런스가 시대의 과제에 명쾌한 답을 줄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 회의가 되길 바란다”면서 “비비비(bbb) 코리아도 언어 장벽뿐 아니라 마음의 장벽, 더 나아가 문화적 장벽이 없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어령 전 장관의 기조 강연을 요약, 정리했다.
통역 봉사에 우리나라 홍익인간 정신 담겨 있다
bbb 운동은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괄하면서 통역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였는데 통역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통역 전문 인력을 많이 고용하자니 예산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bbb 운동이다. bbb 운동은 휴대전화를 이용한 디지털 기술과 통역을 도울 수 있는 인력을 결합한 모델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언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 시도됐다.
나는 bbb 운동을 기획하면서 한국인이 아주 잘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 위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통역 봉사를 하는 bbb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bb 자원봉사자들은 통역 봉사를 위해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에게 기꺼이 제공한다. 새벽 문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런 대가가 따르지 않는 봉사에 살신성의하는 셈이다. 반면 외국 사람들은 개인의 사생활(Privacy)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이 bbb 자원봉사자들처럼 통역 봉사를 할 수 있을까. 난 부정적이다.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더불어사는 문화’ 덕분에 bbb 운동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다.
언어의 장벽이 분쟁 만든다
나는 언어의 차이로 인해 분쟁이 일어난다고 여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자. 언어는 곧 문화이며 언어의 차이는 문화의 차이를 일으키고 나아가 가치관의 차이와 불화를 일으킨다. 나는 국수주의자, 단일 문화권 옹호자는 아니다. 하지만 분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입장이다. 동물들의 의사소통을 예로 들어 보이겠다. 동물들은 인간의 언어처럼 구체적인 뜻이 없어도 ‘소리’만으로 의사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는 종이 달라도 소통이 가능하다. 새가 감미롭게 지저귀면 짝을 향한 구애이지만 날카롭게 울어대면 적을 향한 경고이다. 이처럼 소통이란 구체적인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말의 음색, 높낮이, 제스쳐로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바벨탑(구약성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실제로 만들어진 탑.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전의 초기 인류도 동물처럼 공통의 언어를 가졌을 거라 추측한다. 물론 구석기 시대에도 영역 다툼과 세력 싸움은 존재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분쟁이 일어나는 건 지금보다 적었을 거라 믿는다.
언어의 분화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도 낳았다. 백인들이 세계 패권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쓰는 언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주된 언어가 되었다. 영어를 비롯한 백인 문화권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은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 언어의 차이가 한 인간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된 것이다.
예전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어느 한국 교수님이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교수님이 아는 독일 기자가 사진을 찍으러 한국의 홍도에 갔다고 한다. 기자는 사진 촬영 후 온돌방을 체험해 보고싶어 한 여관에 가서 방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침대가 있는 방을 기자에게 주었다. 서양인이기 때문에 온돌방이 불편할 거라 짐작한 거다. 이를 모르는 기자는 여관 주인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서로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기자가 이 교수에게 전화해 통역을 부탁하니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말이 통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사소해 보일지라도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의 분화를 저지할 수도 당장 단일 언어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앞의 사례와 같이 통역을 통해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도 불화를 해결할 수도 있다.
이제는 디지로그 시대… 연결, 결합이 중요하다
이제는 아날로그(analog)와 디지털(digital)이 합쳐진 ‘디지로그(digilog) 시대’이다.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를 잘 융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날로그 혹은 디지털 한 쪽만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서양 문화권은 관념보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 많이 발달해 왔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책상이라는 물질도 관념이 있어야 존재한다’고 하며, 관념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동양 철학에 비해 보다 ‘물질적’이었다. 반면 동양 문화권은 관념, 조화를 중시했다.
‘목’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서양에서 목(neck)은 막힘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목은 ‘연결’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길과 길을 연결해주는 시작을 ‘길목’이라고 부르고 발목, 팔목 등 다른 신체 부위를 연결하는 부분에 ‘목’이 들어간다. 이처럼 동양 문화권 특히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시키고 연결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조화, 연결이 중요한 디지로그 시대에 대한민국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인은 남을 배려하는 ‘어질 인(仁)’,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서양인은 생각하지 못하는 ‘양수겸장'(양쪽에서 동시에 하나를 노리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아날로그 자산이 있다. 동시에 디지털 기기와 정보 활용 수준도 뛰어나다. 이를 활용한 사업 모델도 여럿 있지 않은가. 그 중 하나가 bbb 운동이다. bbb 운동은 배려 정신과 같은 우리나라 아날로그 문화를 디지털 기술에 접목한 것이다.
우리 문화 활용하는 일이 AI 시대 대처 방법
얼마 전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깜짝 놀랐다. 아이폰의 음성 인식 기술인 ‘시리(siri)’에게 ‘넌 언제 태어났니’라고 물어봤다. 3~4년 전에는 ‘음성인식 기술이 처음 생긴 00년도에 태어났다’는 정보만 알려줬다. 그런데 최근 다시 물어보니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만큼 오래되기도, 갓 태어난 애벌레처럼 어리기도 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인공지능이 정보 제공뿐 아니라 인간의 감성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알파고는 이제 사람하고 바둑 안 둔다. 인공지능 컴퓨터끼리 바둑 게임을 한다. 인간의 바둑 실력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AI 시대를 겁내고 있다.
나 또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공포가 팽배해져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전면 대결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의견엔 동의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모든 부분에서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란 질문엔 단호히 ‘NO'(아니다)라고 답하겠다. 특히 통번역일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보다 잘 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언어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섬세하다. 아주 미세한 차이가 말 전체의 뜻을 바꾼다. 기계에게 한국어는 더욱 어려운 단어다. 한국어는 그 어떤 언어보다 복잡 미묘한 의미가 많다. ‘시원섭섭하다’,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말을 인공지능이 완벽히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이중적 의미가 있는 말들은 그 나라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뜻 풀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문화 습득은 감정이 있는 인간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공지능이 통번역을 완벽히 해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인공지능은 ‘무례’하다. 통번역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하는 일이다.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된 채 할 수 없는 것이다. 온전한 뜻 해석을 위해선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잘 알아야 함은 물론 통역을 의뢰한 사람의 상황까지 이해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기계적으로 모은 데이터들엔 이런 것들이 없다. 현재 기계는 인간이 입력한 수 많은 데이터를 모으고 선택하는 일만 한다.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을 봐라. 당대의 천재들이었지만 인간관계에선 모두 낙제생이었다. 최고 과학기술인이었던 이들이 뛰어난 통역가도 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이다. 수학적 사고 방식과 논리 해결, 정보 수집과 분류 등 기술적 부분에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우수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와 수학적 사고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감성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는 일이 AI 시대의 현명한 대처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가진, 그리고 한국이 가진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언어와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
어느 날 한 남자가 bbb 코리아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베트남인 부인을 둔 그는 부인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화가 심했다고 했다. 이혼 위기에 다다를 무렵, bbb 코리아의 통역 서비스를 받게 됐고 오해가 풀려 사이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 가진 작은 지식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꼈다. 대단하지 않은가.
물질적인 도움은 일시적이다. 그 사람에게 일부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여운은 오래 남지 않는다. 그 사람 인생에 ‘메시지’는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통역 봉사와 같은 재능 기부는 다르다. 재능 기부를 하는 봉사자를 보고 수혜자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러면 도움 받는 사람의 인생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셈이다.
언어와 지식은 나눌수록 커지며, 이러한 가치를 추구할 때 한국 사회도 더욱 발전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앞날은 밝다. 우리에겐 정과 배려의 문화가 있으니까. 언어 장벽을 없애는 통역 봉사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