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직업의 세계
[공익, 직업의 세계] “연구·분석으로 가난 해결… 나의 ‘공대 감성’과도 잘 맞아” ⑤

“국제적으로는 워낙 잘 알려진 NGO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옥스팜을 모르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조직과 함께 성장하는 재미를 느끼며 일하고 있습니다.” 통신기업과 비영리단체를 거치며 ‘NGO’ 와 ‘디지털’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박재순(사진) 옥스팜코리아 디지털마케팅팀 차장은 요즘 일하는 맛에 푹 빠져있다. 영국에서 시작한 국제구호개발 전문 NGO 옥스팜에 입사하면서 부터다. 옥스팜은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가난이 없는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활동해왔으며, 지난 2014년 우리나라에도 정식으로 사무소를 설립했다. 현재 12명의 직원이 한국사무소에서 근무 중이다. -옥스팜은 어떤 일을 하는 조직인가? “글로벌 NGO의 주요업무는 ‘긴급구호’ ‘국제개발’ ‘캠페인’ 세 가지로 나뉜다. 옥스팜은 기본적으로 긴급구호와 국제개발에 대응하면서, 가난의 구조적 변화를 위한 캠페인에도 힘을 쏟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낚시를 가르치라’는 말이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물가에서 고기를 잡을 권리를 보장해줘야,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옥스팜의 관점이다. 불공정한 가난은 후원금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의 개혁과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옥스팜은 이 같은 목소리(캠페인)를 통해 정부와 지역사회를 바꾸고자한다.“ -어떻게 옥스팜에서 일하게 됐나? “대학에서 미디어통신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이동통신사에서 데이터센터 운영, 웹 기획자 등으로 7년간 일했다. 그러다 가정을 꾸리고 아빠가 되면서 후원자로 있던 어린이 양육 전문 NGO로 이직했다. 봉사나 후원을 넘어 ‘세상에 이로운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연계는 에너지가 많은 데서 적은 데로 이동하는데, 왜 사람이 소유한 자원이나 힘은 그렇지 않을까’ 라는 개인적 의문도 이직에 한 몫

[공익, 직업의 세계] NGO와 단체 사이에 다리 놓는 ‘펀드레이저’ 이야기 ④

여러 글로벌NGO 중에서도 앰네스티의 모금은 조금 더 특별하다. 시민 개개인의 후원이 전체 모금액의 95%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영리 영역이 성장하면서 펀드레이저(Fundrazer·모금활동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요즘, 앰네스티의 모금활동가는 어떤 고민을 갖고 있을까. 이은영(36·사진) 앰네스티 모금회원커뮤니케이션팀장을 율곡로에 위치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만났다. 앰네스티는 1961년 설립된 인권단체로 지난 50여 년간 고문·사형·인권탄압에 맞서왔으며, 현재 전세계 700만명의 이상의 회원 및 지지자와 함께 활동 중이다. -앰네스티는 어떤 조직인가. “일반적으로 NGO라고 하면 아이들을 돕고, 빈곤한 세대를 돕는 기관을 많이 생각한다. 앰네스티는 같은 NGO지만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인권옹호와 로비(Lobby∙막후교섭)활동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이다. 올림픽 개최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벌어진 경찰의 민간인 사살 문제를 두고 정부 당국과 책임자에게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발송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국내에서는 ‘로비’의 어감이 부정적이지만, 해외에선 매우 자연스러운 옹호활동의 일부다.” -어떻게 앰네스티에서 일하게 됐나. “앞서 복지재단의 사회복지사로 근무했었다. 그러다 아동복지전문 NGO의 모금담당자로 일하게 됐고, 10년 만에 앰네스티로 직장을 옮겼다. 모금전문가는 후원금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에서만 즐겁게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앰네스티에서의 하루하루가 참 행복하다. 이직을 하고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비영리영역에서 나름 발을 넓혀왔다고 생각했는데 앰네스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네트워크가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NGO와 옹호활동을 하는 NGO 사이에 교집합이 너무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분야가 아니겠나.” -모금활동가란 정확히 어떤 직업인가. “모금가는 돈을 좇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질적으로 사람과 가치를

[공익, 직업의 세계] 럭셔리 브랜드보다 값진 가치를 홍보하다…국경없는의사회 ③

지금까지 국경없는의사회 소셜미디어 홍보를 하면서‘악플’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높은 연봉을 받으며 럭셔리 브랜드를 홍보할 때보다 훨씬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 국경없는의사회의 소셜미디어 채널은 구호현장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하며 많은 네티즌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고 최정혜(32·사진) 디지털커뮤니케이션 과장은 12개에 달하는 한국사무소의 소셜미디어 채널을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이다. 지난 16일, 최정혜 과장을 만나 그녀가 어떻게 국경없는의사회를 선택하게 됐는지 일을 하면서 느낀 보람과 고민에 대해 들어봤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종교, 인종, 국적, 정치적 신념 등에 상관없이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을 펼쳐온 글로벌 NGO다. 1971년, 프랑스 의사와 언론인이 처음 설립했으며 한국사무소는 일본과 홍콩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2012년 문을 열었다.   -홍보·광고는 영리업계의 꽃으로 불린다. 어떻게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할 결심을 하게 됐나? “막연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돼 국제구호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경없는의사회가 노벨평화상을 탔을 때쯤이었다. 의대 진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홍보전문가는 브랜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홍보 전략을 처방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홍보를 전공하게 됐다. ‘홍보를 잘 배워서 NGO로 가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졸업 후 세이브더칠드런에 온라인홍보담당으로 입사(2007년)하게 됐고, 이후 실무경험을 좀 더 쌓으려고 광고대행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외제차, 고급양주 등 한 번에 4~5개 럭셔리 브랜드를 관리했다. 업무경험은 풍부해졌지만, 비영리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2014년,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국경없는의사회에 입사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 “첫째, 현장에 파견 될 의료인과

[공익, 직업의 세계] 韓 전자정부 체계를 개도국에… “UN의 일원으로서 자부심 느껴”②

공익, 직업의 세계 ② 유엔거버넌스센터 한국 직원 3인 “세계 각국의 장차관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고,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눕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국제기구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죠.”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유엔(UN) 산하기관은 어디일까? ‘유엔거버넌스센터(UN Project Office on Governance·UNPOG)’는 한국의 ‘전자정부’ 시스템을 전 세계 유엔 회원국에 전파하기 위해 2006년 처음 설립됐다. UNPOG의 한국인 직원 김진아(32) 홍보팀장, 서예진(29) 운영지원팀장, 윤창록(38) 역량개발팀장을 만났다.     이미지 크게보기지난해 11월 피지에서 개최된 ‘남태평양 SIDS(군소도서개발도상국) 전자정부 역량강화 워크숍’에 참여한 윤창록 팀장과 서예진 팀장(가운데). / UNPOG 제공―각자 맡은 업무에 대해 소개해 달라. 윤창록 역량개발팀장(이하 윤): UNP OG의 주 업무는 전자정부 정책 및 전략을 교육하고, 우수사례를 공유하는 것이다. 각 국가의 행정 시스템은 공무원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서로 필요한 사람을 연결시켜주기도한다. 일명 ‘브리지 빌더(Bridge Builder)’다. 김진아 홍보팀장(이하 김): 홍보팀 업무는 민간 기업 홍보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프로젝트 결과물을 출판해 홍보하기도 한다. 외부 조직과의 소통도 홍보팀에서 담당한다. 서예진 운영지원팀장(이하 서): 유엔 산하 기구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뉴욕 본부와 함께 진행해야 한다. 이때 UNP OG와 뉴욕본부 간 사업 이행에 필요한 각종 협의를 담당한다. ―업무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나. 윤: ‘유엔에 들어가려면 5개 국어는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스페인어 실력을 열심히 쌓았다. 하지만 막상 입사해보니 영어가 가장 중요했다. 미국 대학원에서 공공행정학까지 공부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의 난이도다. 우리끼리는 ‘유엔 영어’라고 하는데, 어휘가

[공익, 직업의 세계] “‘과학 선생님’ 대신 선택한 길… 매일 생명 구하는 보람 느끼며 바이러스와 싸워”①

국제백신연구소(IVI) 연구원  ‘더나은미래’는 공익 분야 직업의 세계를 취재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첫회는 국제기구인 ‘국제백신연구소(IVI)’ 연구원입니다. 편집자 “우리는 하나의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10년을 바칩니다.” 지난달 14일, 서울대학교 내에 위치한 ‘국제백신연구소(이하 IVI)’에서 만난 최정아(35·사진) 연구원의 말이다. 1997년 설립된 IVI는 대한민국에 본부를 둔 최초의 국제기구로, 개발도상국을 위해 백신을 개발 및 보급하는 일을 한다. IVI에는 현재 15개국에서 온 130여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다. 최정아 연구원도 성균관대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2011년 IVI에 입사했다. 당시 3곳의 대기업 연구소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연봉이 절반가량인 ‘IVI행’을 택했다. 그녀만뿐이 아니다. IVI에는 1명 모집에 평균 80여명이 지원할 정도로, 청년들의 관심은 뜨겁다. -왜 절반 연봉을 받는 IVI를 택했나. “‘과학 선생님’이 되라는 주위 권유 대신 ‘연구자’의 길을 택한 건, ‘인류가 살아가는 데 도움 되는 일을 할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라는 큰 꿈에서였다. 하지만 여러 사기업 연구소 면접에 가보니, 기업 이윤과 공익의 절충조차 찾기 어렵다는 게 분명해지더라. 콜레라, 장티푸스 등 개발도상국에서 발병해 ‘돈이 안 된다’는 경제 논리에 밀려난 개발의 사각지대를 위해 일하는 IVI의 보람이 정말 커보였다. 지금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부터 메르스, 지카 바이러스를 막는 백신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IVI 지원 당시 어떤 준비를 했나. “IVI는 ‘전문성을 가진 인재’ 선발에 초점을 둔다. 특히 프로젝트팀별로 인원을 채용해, 비교적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일을 할지 분명하다. 당시 팀 리더였던 박사님의 논문부터 최신 학회 발표까지 살피며 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