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국내 시리아 난민 477명, 지금 어디 있나

허점투성이 난민 지원 실태 인도적 체류자, 기본적 생활 보장 없어 보여주기식 행정… 난민법 보완 필요 시리아 내전을 피해 아델(34·가명)씨와 조카 압둘(32)씨가 한국에 온 것은 2014년 3월. 이들은 난민인정 신청 3개월 뒤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았다. 그러나 의료·소송 등을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에게 주는 기타(G-1)비자로는 그의 신분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었다. 그해 말, 살 곳을 찾아 다시 난민선에 오른 압둘씨는 이탈리아로 가던 중 선박 좌초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5월, 법무부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에게 최소 인도적 체류를 허가한다’는 방침을 정한 후 477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난민을 이렇게 무더기로 받아들인 적 없는 우리나라에서 극히 이례적인 조치였다. 지난해 4월까지 허가된 전체 인도적 체류자 수(208명)의 2배를 넘는 수치였다. 인도적 체류자는 사유(인종·종교·국적·특정사회집단 구성원·정치적 견해로 인한 박해) 불충분으로 ‘난민인정자’가 될 순 없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국내 체류를 허가받은 난민을 뜻한다. ◇난민신청자보다 못한 인도적 체류자 하지만 우리 정부가 시리아 난민에 대한 인도적 체류 허가만 했을 뿐, 사후 관리는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현재 477명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자료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민구호단체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는 “지난해 인도적 체류자 급증에 따른 국내 거주 시리아 난민 실태조사를 정부 측에 건의했지만, 별다른 대응은 없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뒤다. 인도적 체류자는 최대 1년 단위로 체류 기간을 갱신해야 한다. 여행증명서 발급 등 인정 난민이 받을 수 있는 별도 권리조차 인정되지

“살아남기 위해 모였고, 끈끈한 신뢰 바탕으로 자립했죠”

콩고 난민 공동체 협동조합 아프리카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234만㎢의 광대한 땅, 콩고민주공화국(이하 콩고). ‘아프리카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땅엔 상처가 가득하다. 15년 동안 이어진 내전으로 500만명에 달하는 주민이 폭력단체에 의해 살해당했고, 콩고 동부에서만 20만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으며, 자국을 탈출한 난민이 50만명을 넘어섰다. 레베카(가명·36)씨도 2004년 전쟁터로 변한 콩고를 뒤로 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레베카씨처럼 콩고에서 피난 온 이들은 함께 모여 콩고 커뮤니티를 이뤘다. 그러나 콩고 커뮤니티에 속한 20명 중 난민 인정을 받은 인원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한국 땅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콩고 커뮤니티’만의 경제적 자립 모델이 필요했다. 특히 지난 2008년 ‘콩고 커뮤니티’ 회원 중 한 명이 공사장에서 작업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콩고로 보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지만, ‘콩고 커뮤니티’가 경제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나 다른 기관으로부터 지원받을 방법도 없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지속가능한 운영 방법을 모색하며 머리를 맞댔다. 조직도를 만들고, 공동체 규약을 정했다. ‘매월 1만원 이상의 회비를 낼 것’ ‘한 달에 한 번 가지는 모임에 반드시 참석할 것’ ‘커뮤니티 내에선 정치적 발언을 삼갈 것’ 등이 그 내용이다. 회비를 통해 모인 금액은 응급 상황이 발생한 이들에게 보증 없이, 이자 없이 빌려준다. 이 덕분에 보증금이 없어 월세 방에서 쫓겨난 회원이 ‘콩고 커뮤니티’의 도움으로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었고,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Cover Story] 난민에게 희망 전하는 ‘김종철·박진숙’ 부부

법률 지원으로 소송 돕고, 재능 지원으로 자립 기틀 마련 움켜쥔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돌이켜보니, 모든 순간이 마치 예정된 일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머물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난민(refugee,難民)’들에게 희망을 전한 지 벌써 7년. 만남은 용기를, 나눔은 행복을 가져다줬다. 김종철(42), 박진숙(39)씨 부부는 맘속에 차곡차곡 담아온 인연의 끈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낯선 손님들을 집으로 계속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몸집도 크고,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죠. 알고 보니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탈출한 난민들이었어요. 식구가 자꾸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입양을 고민할 정도였으니까요.” 전 세계 난민 수는 총 1050만 명(2009년 UN난민기구 통계)으로, 그 중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난민신청자는 3300명(2010년 6월 말 기준)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들은 250명에 불과하다. 난민 인정 기준이 까다롭고, 법에 명시된 처리 기간이 없어 절차가 장기화됐기 때문이다. ‘공익 변호사’ 김종철씨가 이들에게 눈을 돌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탈북자·결혼이주여성 등 이주민의 권리옹호와 소송 절차를 돕는 중에 우리 사회의 절대적 약자는 바로 난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들이 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2~3년 걸리고, 소송까지 갈 경우 5년 이상 소요됩니다.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 외에 생계를 위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합니다. 당장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데,

[Cover Story] 미래 미소(美小) 캠페인④ 난민 아이들의 아픔·긍정적 에너지 함께 담아

미래미소캠페인 지구IN 난민촌 아동사진치료&전시회 ‘지구IN’ 한국 청년 네명 방콕 난민촌 ‘매솟’ 찾아가 아이들에게 사진·그림 가르쳐 그림 속에는 성폭력 등 트라우마의 흔적 담겨 작품 속에는 성장·희망 표현도… “웬 미친놈이 학교 가는 사내애에게 / 황산을 끼얹었다 / 푸른 잎새 넘실거리는 보리밭에서 / 깜부기를 뽑을 때처럼 / 삶은 난감한 것이다.” 시인 이성복은 ‘삶은 난감한 것’이라고 했다. 그 시각 그 자리에 그 아이가 있었고 같은 시각 같은 곳에 미친놈이 황산을 들고 서 있었다. 원인은 있되 이유는 없고 가혹한 결과만 남아 있더라도 삶은 삶이니, 삶은 난감하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왠지 이 시를 떠올렸다. 사진 속의 아이는 노란 천을 뒤집어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흑백 사진에 오일 파스텔로 색을 칠한 작품 속 아이의 얼굴엔 파스텔의 질감 속으로 파고든 긁힌 자국들이 선명하다. 파스텔은 코를 지웠다. 빨갛게 번진 입술을 살짝 벌린 아이의 입은 이제 막 말을 시작하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을 끝내려는 것 같기도 하다. 아픔과 괴로움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외부인은 그저 삶이란 난감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방콕의 북서쪽, 버스를 타고 9시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매솟’에서 만난 아이라고 했다. 매솟은 므이강을 사이에 두고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한 도시다. 미얀마 정부군의 탄압을 받은 소수민족 중 일부가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므이강을 넘어 매솟에 살림을 차렸다. 민족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고 타국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다 보니 난민 커뮤니티가 생겼다. 그러나

‘난민제도 국제법 수준으로’ 독립된 난민법 발의에 기대

김종철 변호사 기고 한국이 난민협약에 가입한 지 10년 만에 최초의 난민으로 인정한 사람은 어디 있을까. 수소문을 해보니, 그는 유럽에 있었다.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출입국 관리법을 살펴보면,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국의 난민제도는 국제적인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 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과, 출입국을 통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똑같은 정신으로 운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이 지난 5월 대표 발의한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안’은 한국의 난민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되 독립된 난민법형식으로 담아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의 ‘난민 제도’에는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난민 신청자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입증을 요구하고 난민인정절차에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는 난민신청자에게 합당한 사회적 처우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난민들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맨손으로 탈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잘못된 판단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때,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개정안에서는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그 입증 정도를 낮추고, 난민 인정 절차에 있어 최소한의 적법 절차(due process)를 지키도록 했다. 인터뷰를 할 때 자격을 갖춘 통역인으로 하여금 통역을 하도록 하였고, 인터뷰에 신뢰하는 자가 동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했으며, 난민신청자가 인터뷰 내용이 기록된 조서를 확인하고 그 조서를 복사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은 또 난민신청자의 사회적 처우를 개선하는 규정도 두고 있다. 그동안 취업을 금지시키면서 주거와 생계에 대해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은

난민 신청자, 법 지키고 굶어 죽든지… 법 어기고 살든지

UN난민협약 60주년 앞둔한국의 난민보호 실태 김구 선생·김대중 前대통령 망명도 현대적 개념의 ‘난민’에 속해 까다로운 심사절차에 생활고 시달려 불법취업 현장으로 몰아가는 현실 2011년은 UN난민협약이 마련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이 협약은 난민을 인종이나 종교, 정치적 견해 등의 이유로 박해를 받아 모국을 떠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후 2001년 첫 난민을 받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총 210명을 인정했다. UN난민기구 등은 국내 난민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이 없음을 지적해 왔다. 더나은미래 팀은 협약 체결 60주년을 앞두고 한국의 난민보호 실태를 점검해봤다. 편집자 주 나이지리아 출신 기독교인 니키(가명·44)씨는 1990년 무슬림 가정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니키씨는 세 명의 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남편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던 중 2002년 북부도시 카두나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유혈 충돌이 일어나 200명이 죽고, 600명이 다쳤다. 당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남편은, 자신의 가족들이 불을 지른 차 안에서 아이와 함께 숨졌다. 니키씨 역시 친척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언니의 도움을 받아 케냐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2007년, 한국으로 도망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 아이는 언니에게 맡겼고 나머지 한 아이는 피신하던 중 죽었다. 한국에 온 니키씨가 난민 인정을 받는 데까지는 무려 2년이 걸렸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는 취업을 금지했다. 생계가 막연했던 니키씨는 결국 ‘몰래’ 영어 과외를 했다. 니키씨는 “언제 결정이 날지 모르는 난민 심사를 기다리며 가족 걱정과 생계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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