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주신 많은 도움 나중에 꼭 보답할래요”

은진이 이후… 지원·응원 쏟아져 지난달 28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지면에는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어하는 은진(가명·16)이의 이야기가 실렸다. 은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가야금 병창을 배운 지 1년4개월 만에 도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올 3월에는 광주예술고등학교 국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할 예정이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공연이나 대회 때 입을 한복이 없어 매번 친구에게 옷을 빌려 입고 있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돌려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탠 적도 있다. 이런 힘든 상황에도 은진이는 씩씩하다.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공연을 하고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 은진이의 꿈이다. 기사가 나간 후 은진이에게 학비를 지원하거나, 공연용 한복을 지원하겠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2002년 정년퇴직한 이상봉(71)씨는 은진이를 위해 100만원을 선뜻 내고는 “나도 연금을 타서 사는지라 생활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앞으로 은진이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꾸준히 돕고 싶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독자도 은진이에게 50만원을 보내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학생이 대견해서 후원을 하게 되었다”라며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꼭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한복집을 운영한다는 한 후원자는 공연용 한복을 지어주겠다고 소식을 전해 왔다. 방학을 맞아 집에서 가야금 병창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은진이는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모인 돈으로는 공연용 한복과 음악 기초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전자피아노를 살 예정이다. 은진이는 “많은 분들께 받은 도움을 꼭

[Cover story] 세계 Top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⑩ ‘하갈(Hagar)’ 설립자 피에르 타미

“머리 아닌 가슴으로 운영”… 거리의 아이들을 ‘꿈꾸는 아이’로 미소년 소팟(Sophat)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바로 부엌이다. 채소를 다듬고 잘게 써는 일부터 고기를 알맞게 구워내는 일까지 다 그의 몫이다. 소팟과 함께 일하는 다른 요리사들은 “요리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성격도, 태도도 너무 좋은 친구”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소팟은 “너무 행복하다”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거리의 아이로 자랐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쓰레기를 뒤지며 간신히 굶어 죽지 않는 삶을 살았죠.” 꿈꾸는 일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던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07년 ‘하갈(Hagar)’을 만난 이후다. ‘하갈’은 아동 성매매, 가정폭력 등으로 상처 입고 버려진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다. 직업훈련, 사회훈련을 위해 출장요리 업체 ‘하갈 케이터링’ 같은 사회적 기업도 운영한다. ‘하갈’은 당시 소팟에게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거리의 아이였던 소팟에게는, 재료를 다듬는 즐거움도, 음식을 만드는 흥분도, 손님이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닦는 보람도 다 처음이었다. 직업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팟은 현재 다른 레스토랑에서 정식 요리사로 일한다. 프놈펜에 위치한 ‘하갈’은 이처럼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정에서 버림받은, 또는 상처를 받은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다. 집에 감금되어 남편에게 매일 폭행을 당하다 구출된 젊은 여성, 가난 때문에 고작 300달러에 팔려가 아동 성매매에 수년간 희생되다 탈출한 소녀 등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하갈’을 찾는다. 지난 15년간

“빈곤의 근본적 해결은 일자리로 자활 돕는 것”

양옥경 한국사회복지학회장 韓복지예산, 전체 10% 못 미쳐…아직은 “선택적 복지”가 대안, ‘사회적 기업’ 일자리 늘리고 가족형 복지체계 마련해야… 요즘 정치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지’이다. 이 키워드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다음 정권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민주당은 4대강 예산으로 인해 “복지가 실종됐다”고 비판하고 있고, 정부는 “예전보다 복지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전 대표 또한 ‘한국형 복지’를 주창하며 이 논쟁에 불을 붙였다. 2010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한국사회복지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화여대 양옥경(51·사진) 교수를 만나 우리나라 복지의 나아갈 길에 대해 물었다. 한국사회복지학회가 주최한 올 추계 학술대회의 주제도 ‘사회복지, 빈곤을 재조명하다’였다. 편집자 주 ―빈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과거엔 ‘빈곤’이라고 하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빈곤층은 일하는 빈곤층입니다. 이를 ‘신빈곤층’이라고 하지요. 일하는 데도 계속 가난에 머무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을 위해 빈곤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예전보다 우리나라가 굉장히 잘살게 되고, 특히 부유층은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빈곤층은 더 늘어났지요. 과거에 중산층으로 분류되던 사람들까지 빈곤층으로 떨어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자활이 중요합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장애인이건 노인이건 가난에서 빠져나오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소액대출이나 희망키움 통장 같은 것도 중요한 정책이겠지만, 결국은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생각을 통해서 이러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정부에서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착한가족’ 인터뷰

쓸 줄 몰라 소멸됐던 포인트 “기부한다니 정말 좋네요” 나눔은 내 삶의 일부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으면…” ‘착한카드’ 캠페인이 첫 출발을 알린 지 오늘로 2주가 됐다. 그동안 전국의 독자들이 착한카드 캠페인 홈페이지(good.chosun.com)를 통해 속속 동참해왔다. 조선일보 공익 섹션 ‘더나은미래’는 착한카드 캠페인에 참여하는 고마운 독자들을 ‘착한가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착한가족은 생활 속에서 매일 기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착한카드를 쓸 때마다 포인트가 기부되니, 차를 마셔도 밥을 먹어도 영화를 봐도 기부를 하게 된다. 착한카드 캠페인이 시작되자마자 기꺼이 착한가족이 되어준 두 명의 독자를 만났다. 편집자 주 ◆최철순씨(66세) “따르릉, 따르릉.” 착한카드 캠페인 시작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 지난 14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착한카드를 신청하려고 하는데 인터넷으로 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최철순(66)씨는 기자의 안내를 받아 착한카드 신청을 마치고 착한가족이 됐다. “신문을 보자마자 ‘아, 참 좋은 캠페인이다’ 싶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카드 포인트로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겠지만, 저처럼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카드 포인트를 그대로 썩히게 마련이거든요. 어차피 소멸될 포인트로 기부를 할 수 있다니 좋은 아이디어구나 싶어 얼른 신청했지요.” 최씨는 최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 유용 사건이 터지면서 기부를 하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고 말했다. 자신이 낸 기부금이 투명하게 전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착한카드 캠페인은 “조선일보가 한다니까” 일단 신뢰가 갔다고 했다. 언론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정직하게 기부금을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동안에는 명절

혜린이 보도 후… 쏟아지는후원 손길

지난 14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지면에는 그룹홈을 떠나 대학생활을 준비하는 혜린(가명·19)이의 이야기가 실렸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한 혜린이는 어머니를 따라간 후 공부 대신 어머니의 일을 도와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말에 집을 나와 아동을 보호·양육하는 그룹홈 생활을 시작했고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3년간 장학금을 주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착실하게 대학입시를 준비해왔다. 기사가 나간 후 혜린이를 돕고 있는 굿네이버스에는 혜린이의 등록금과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후원자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지난 21일 기준으로 혜린이에게 전달될 통장에는 이미 420만원이 모였다. 이와 별도로 혜린이의 대학 4년 등록금을 전액 후원하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었다. 등록금 전액 후원 의사를 밝힌 김성주(65)씨는 “은퇴 후 사회복지재단을 만들 계획인데,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살고 있는 혜린이가 사회복지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 대견했다”며 “앞으로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50만원을 보낸 한 후원자(46)도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혜린이를 보니 ‘이 아이는 조금만 도우면 열심히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굿네이버스 담당자에게 “힘든 일도 있겠지만 열심히 살아달라는 말을 혜린이에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모인 지원금은 만 18세가 되면 그룹홈을 나와야 하는 혜린이의 자립비용과 대학등록금으로 쓰인다. 후원 소식을 들은 혜린이는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후원해주신다니 어리둥절하면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혜린이는 현재 전북지역에 있는 대학의 간호학과와 사회복지학과 정시모집에 지원한 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을 마치면 세계를 돌아다니며

[Cover story]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꿈꾸는 소녀 은진이

“생활비 때문에 전단 돌리지만 괜찮아요, 제겐 꿈이 있으니까요” 굳세어라, 은진아 가야금 열두 줄 위로 오른손이 춤을 췄다. 왼손은 천천히 현을 짚었다. 구성진 가야금 가락에 맞춰 열다섯 소녀 은진(가명)이는 가야금병창곡 ‘고고천변’을 불렀다. ‘고고천변’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곡 중 하나로, 자라가 용왕의 약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나왔을 때 처음 본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곡이다. 맺고, 풀고, 꺾는 판소리 가락 속에 은진이는 어느새 자라가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뭍에 오른 자라처럼 목소리에 어떤 경이로움이 묻어났다. “무대가 너무 좋아요. ‘우리 것’인 전통 음악과 한복도 좋고요.” 은진이는 잇달아 네 곡을 부르고서야 무대에서 내려왔다. 숨이 차오를 법도 하건만,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은진이가 ‘가야금병창’을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후교실’에서였다. 일주일에 두 번 1시간씩 배우는 게 전부였지만 처음부터 가야금병창에 푹 빠져들었다. 소질도 빼어나 1년 4개월 만에 전남도지회 주최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개인 일등을 차지했다. “대회에서 입상한 후에 가야금병창을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는 내내 ‘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당시 어려운 집안형편을 몰랐던 은진이는 ‘레슨받고 싶다’며 엄마를 졸랐다. 은진이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부모님에게 “은진이는 정말 소질이 있다”며 “레슨비를 조금만 받아도 좋으니 꼭 가르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은진이는 결국 1시간에 5만원을 내고 다른 친구들보다 저렴하게 개인 레슨을 받게 됐다. 친구들이 방과 후에 분식집에 들러 수다를 떨며 놀 때 은진이는 밥도 거르며 연습을 했다. 개인 레슨에서

그룹홈 떠나 대학생으로… ‘혜린이의 홀 로서기’ 응원해주세요

어린시절 부모 이혼, 공부 대신 일 시키던 엄마 떠나 중 3때부터 ‘그룹홈’에서 생활’ 나만 힘든 게 아니다…’스스로 다독이며 열심히 공부. 사회복지학 전공해서 저개발국 어린이 돕고 싶지만 대학등록금 생각하면 막막 “헤어진 지 6년 만에 동생이랑 아빠를 만났어요. 동생은 남처럼 어색했고, 아빠는 ‘미안하지만 대학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만 했어요. 등록금 때문에 찾아간 건 아니었는데….” 지난 13일, 전주시 한 그룹홈에서 만난 혜린이(가명·19)는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혜린이의 부모님은 7년 전 이혼했다. 혜린이는 어머니를, 혜린이의 남동생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두 살 터울인 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동생의 안부가 궁금했던 혜린이는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어보고 아버지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재혼한 아버지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고 못살게 굴던 예전의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남동생은 청소년 축구선수가 되어 있었다. 남동생의 10살 때 모습만 기억하고 있던 혜린이는 훌쩍 커버린 동생을 보며 동생을 잘 키워주신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고마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혜린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동생에게 돈이 많이 들어가니 너 대학은 못 보내주겠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버지의 새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혜린이는 그 후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사실 혜린이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남동생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동생이 걱정되어서였다. 어머니가 자신의 고등학교 진학을 막았던 것처럼 아버지 역시 동생의 고등학교 진학을 반대하지는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남동생은 분명 저보다 훨씬 힘들어했을 거고,

“세계에 우리 나눔정신 알리는 봉사자들이 진짜 애국자죠”

정정섭 기아대책 회장 “내가 지난 21년 동안 한 일은 세상 곳곳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국제구호개발 NGO 기아대책의 정정섭(69·사진) 회장이 말했다. 대부분의 NGO가 가장 욕심내는 일이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가는 곳곳이 전쟁터이거나 재난이 휩쓸고 간 지역이고, 굶주림과 질병에 고통받는 땅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을 돕는 마음을 내는 것도 힘든데, 아예 현장에 눌러 살며 그들과 함께 할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1000명을 넘어섰다. 77개국에 보낸 ‘사람의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진 셈이다. 1989년 기아대책을 설립한 정정섭 회장은 “후원자 사무실 한편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던 기아대책이 이만큼 성장했다”고 뿌듯해했다. 설립 첫해 780명에 불과했던 후원자 수는 2010년 현재 27만8000명을 넘어섰고, 1억8000만원(1989년)에 불과했던 후원금도 올 한 해 1246억원의 사업 예산으로 늘었다. 21년간의 세월 동안 정정섭 회장의 머리도 하얗게 세었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산행에서 늘 1등을 했었지만, 올해는 무릎이 속을 썩인다. ‘신념’ 하나로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뛰는 기아대책 식구들 얘기를 할 때는 눈시울도 붉어졌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빛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2030년까지 10만명의 해외 봉사단원을 파견하는 것이 목표다. ―왜 사람입니까. “모금을 많이 한다고 좋은 NGO는 아닙니다. 사람이 함께 가야 믿을 만하고 확실합니다. 우리 후원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사람들이 돕게 하려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이 가야 대한민국이 돕는다는 걸 여과

“여러분이 읽으면 노숙인들의 절박한 꿈 이룹니다”

잡지 ‘빅이슈’ 판매 르포 전 세계 10개국 발행 수익금 50% 이상 노숙인에게… “커피 한 잔도 안 되는 금액으로 모두가 웃는 세상 만들 수 있어”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서민들이 제일 많이 이용한다는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신도림역. 1번 출구 앞의 사람들은 칼바람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빅이슈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빅이슈는 지난 7월 창간한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다. 독자가 3000원을 내고 잡지를 사면 1600원이 판매자인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석 달 경력의 ‘빅판(빅이슈 판매자)’인 양정선(50)씨 옆에서 일일 ‘빅돔(빅이슈 판매도우미)’을 체험하는 기자 역시 빅이슈에서 정한 슬로건을 외쳤다. “여러분이 읽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빅이슈입니다.” 그 말을 듣더니 양씨는 껄껄 웃었다. “세상까지는 안 바뀌더라고요.” 양씨는 “1차 목표는 하루에 30부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침 9시부터 시작한 빅이슈 판매는 30분이 지나도록 개시(開始)도 못하고 있었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린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갔다. “커피 한 잔 드세요.” 양씨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커피를 따라줬다. 달달한 커피가 목으로 넘어가니 추위에 바짝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양씨는 커피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빅이슈를 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입니다’라는 말을 안 했어요.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제 입으로 하기 그렇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행인들과 눈을 맞추며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입니다”라고 크게 외친다. 양 씨는 “빅이슈를 팔면서 사람들이나 사회와 관계를 회복한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양씨의 휴대폰으로

1급 장애인만 ‘도움’이 필요한가요?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서비스 르포 만 6~18세 활동보조지원 月 60시간 이하로 제한 2급 장애부턴 혜택도 못 받아 반짝 추위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던 지난 15일 아침 7시. 서울 동작구 한 아파트입구에서 휠체어를 탄 동준이(가명·16)를 만났다. 동준이는 기자가 하루 동안 ‘활동보조지원서비스’를 하기로 한 뇌병변 1급 장애아다.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서비스란 혼자서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을 수행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보건복지부에서 활동보조인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장애인 가족의 부담을 덜고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기자가 첫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동준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 아침산책을 다녀오던 외할아버지를 본 것이다. 깜짝 놀란 기자에게 동준이 어머니 최희승(가명·42)씨는 “외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어날 때부터 작은 뇌를 가지고 태어난 동준이의 지능은 만 1세에서 멈췄다. 좋고 싫음은 구별할 줄 알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아니면 동준이의 의사표현을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했다. 동준이는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집에서 밥을 먹고 씻고 옷을 입는 것은 어머니의 손을 빌린다. 학교에 가고 점심을 먹고 일주일에 한두 번 언어치료와 재활원 마사지를 받는 곳까지 이동하는 일은 활동보조인과 담임교사의 도움을 받는다. 기자는 어머니로부터 동준이의 휠체어를 넘겨받아 부드럽게 밀어보았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길 건너 통학 버스를 기다리는 곳까지 가는 동안, 휠체어는 길 위의 작은 요철에도 들썩거렸고 낮은 턱에도 자꾸 멈춰 섰다. 동준이를 휠체어 채로 통학버스에 태워 학교에 갔다. 동준이는 장애인 특수학교인 한국우진학교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재학 중이다. 4교시를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⑨ 인도 지적장애인 취업센터 연 수간다 수크루타라지

“지적장애인이 어떻게 일하냐고요? 조금 느리지만, 함께라면 가능하죠” 국제우주항공박람회 유치(1993), 국방연구개발기구(DRDO) 컨설턴트, 데칸항공 최고기업연락경영자(Chief Executive Corporate Liaison), 정부 내 정보기술부 프로그램 디렉터. 국방과 정보기술(IT) 분야에서의 화려한 경력과 타이틀, 그 모든 것이 한순간 의미가 없어졌다. IT업계 내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였던 수간다 수크루타라지(Sugandha Sukrutaraj·54)씨가 2000년, ‘스페셜 올림픽(Special Olympics)’을 만난 후의 일이다. ‘스페셜 올림픽’은 지적장애인들의 올림픽으로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여동생, 故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 여사가 시작했다. 선수보다 자원봉사자가 더 많은 ‘특별한’ 올림픽으로 4년마다 개최된다. 그녀는 2000년 12월, 인도 스페셜 올림픽의 이사로 초청됐다. 그렇게 많은 지적장애인을 만난 것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몰랐던 것이, 무관심했던 것이 미안했습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셜 올림픽에서 지적장애인들을 만난 지 4년 후인 2004년, 수크루타라지씨는 ‘AMBA CEEIC’라는 지적장애인의 경제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센터를 세웠다. 그 결과 현재 인도 전역에는 AMBA CEEIC 센터가 26곳이 있다. 235명의 청년들이 직업기술을 훈련받고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 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은행, 학교, 공항 등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도 49명이나 된다. 2007년 아쇼카 펠로로 선정되어 지원금도 받았다. “항상 ‘절대로 늦은 때는 없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기업을 설득해 업무계약을 맺는 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진 않더라고요. 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조금 느릴 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진 않거든요. 만약 어떤 일이 어렵다면, 좀 더 쪼개고 나누어서 여러 명이 하면 됩니다. 혼자 해야

“사람 마음 움직이던 광고쟁이, 나눔 팔기 위한 준비였다”

문애란 한국컴패션 ‘상근 봉사자’ “기부 하라고 강요하기보다 인생에 어떤 영향 미치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어필합니다” 항상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팔기 어려운 상품이 ‘나눔’이라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상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게 할 것인지를. 그 고민 끝에 만난 사람이 광고회사 ‘웰컴’의 문애란(56) 전 대표다. 제일기획 공채 1기로 ‘최초’의 여성 카피라이터, 제작팀장, 독립 광고대행사 대표까지 ‘광고계 여성 1호’를 독차지했던 그녀가 이제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의 ‘상근 봉사자(Fulltime Volunteer)’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갖고 싶도록, 더 많이 사고 싶도록 만드는 광고업계에서 더 소박하게 살고 더 많이 나누도록 해야 하는 비영리 부문으로 옮긴 이유가 궁금했다. ―광고 쪽과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늘 새로운 일을 추구하십니까. “새로운 일을 추구한다기보다는 그런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발명가였던 아버지가 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던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요. 운이 따라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습니다.” ―컴패션에서도 ‘최초’의 상근 봉사자라고 들었습니다. 왜 ‘올인(all in)’을 선택하셨습니까. “거역할 수 없었던 마음의 소리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서정인(48) 한국컴패션 대표와 인연이 되어 필리핀의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전 트립(vision trip)’을 갔습니다. 저는 평생 광고 일을 하며 좋은 호텔, 좋은 경치, 좋은 음식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삶에 회의가 들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도 행복해하고 있었습니다. 삶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