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일(일)

한국 기업, 이들 앞에 떳떳합니까

해외 진출한 국내 기업의 두 얼굴
국내기업들, 불법 채용 등 인권·환경 침해 문제 심각
하도급으로 정규채용 피하고 눈에 쇳조각 박힌 부상자에 약만 주고 근무 강요하기도
현지에서 인권 논란 생기면 사회공헌으로 덮기 일쑤 관련 기관이 모니터링해야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는 국내 기업들의 ‘두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겉으로는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지만, 정작 기업 내부의 인권·노동·환경·안전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월 1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해외 진출 한국 기업의 인권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필리핀·미얀마·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부도덕한 행태로 인한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상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물품을 지원하고 학교를 짓는다고 해서, 투명하고 윤리적인 책임경영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사회공헌으로 혼동하지 말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사회공헌으로 덮으려는 해외 진출 기업들의 행태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공익인권법재단 제공·조선일보 DB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사회공헌으로 덮으려는 해외 진출 기업들의 행태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공익인권법재단 제공·조선일보 DB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사회공헌으로 덮는다?

한국의 대형 건설·조선업체인 H사의 필리핀 현지 직원 J씨는 2012년 8월, 용접 도중 철근에 눈을 맞았다. 눈에서 피가 나는데도 회사에선 약만 발라주고 일터로 돌아가라고 했다. 통증이 계속되자 J씨는 다른 병원을 찾았고, 그의 눈엔 쇳조각 2개가 박혀 있었다.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회사에선 병가를 줄 수 없다고 했다. H사의 ‘기형적인 고용 형태’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필리핀 노동법상 6개월 견습 기간을 거치면 정규직으로 간주해야 하는데, A하도급업체로 고용해서 6개월이 지나면 해고한 뒤, 다시 B하도급업체로 재고용하고 있는 것. 이에 현지 직원들은 필리핀 노동고용부에 노조 설립 신고를 했지만, 노동고용부는 “직접 채용한 직원이 없어 노조 설립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해당 조선소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반려했다.

이 문제는 근로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직원들의 시위가 거세지면서 불거졌다. 필리핀 정부 및 국회는 해당 조선소 현장 조사 후 수차례 시정권고를 내렸다. 지역 시의회에서도 노동 조례와 지역 법에 따라 해결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8월, 공익법센터 ‘어필’ 등 공익 변호사 단체 및 활동가들과 함께 해당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들을 만나고, 현장 보고서를 작성했다. 현장을 다녀온 한 인권변호사는 “지난해 가을, 현장 조사 및 보고서 작성 때 H사로부터 답변이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을 기준으로 H사의 필리핀 사회공헌 내용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전까진 보이지 않았던 ‘H사, 필리핀 현지법인 사회공헌에 박차’, ‘글로벌 조선소로 성장한 H사, 사회공헌도 통 크게’란 제목의 홍보 기사들이 작년 11월을 기점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H사가 필리핀에 교육센터를 건립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용접 등 분야별 기능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건강검진과 치아 진료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H사 관계자는 “국가인권위의 조사 여부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해당 조선소에선 85%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산재 문제 해결을 위해 사내에 병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해외 진출 기업 CSR 현황, 모니터링 시스템 필요

최근 미얀마에서도 D사의 인권·환경 침해 문제로 시끄러웠다. 2008년 D사가 미얀마 북서부 해안에서 진행하는 가스개발사업 때문에 인근 주민들의 농지 사용이 불가능해졌기 때문. 주민들은 “폐기물이 농토로 침범해 5~10년간 농사를 짓기 어려워졌는데, 보상받은 액수는 농산물 2년치 수확량에 불과하다”며 항의했다. 현장을 다녀온 이상수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사를 원치 않는다는 주민들에게 D사가 병원 및 학교 건립을 약속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병원 문은 닫혀 있고 상주하는 의사나 간호사도 없었다”면서 “학교도 건물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교사들의 항의가 높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D사 관계자는 “농지 소유주가 보상비를 수령한 후 주민들을 위한 피해 복구를 실시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고, 피해 농지에 대한 영구 매입 및 보상을 완료할 계획”이라면서 “현재까진 학교·진료소 등 하드웨어를 당사가 설립하면 미얀마 정부가 사후 운영 및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방식이었지만, 앞으로 건물 유지 비용을 별도로 지급할 예정이고, 초등학교 리모델링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2012년 미얀마에 공장을 세운 국내 대표 가발업체 H사 역시 근로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직원들을 상대로 사업을 철수하겠다고 협박한 뒤, 실제로 공장을 폐쇄했다가 다시 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미얀마에 진출한 제화업체 E사 역시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E사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S씨는 “12시간 동안 일하면서 20분을 쉬는데, 700명이 일하는 공장에 화장실이 20개라 20분 만에 화장실을 다녀오기 어렵다”면서 “근무시간 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관리자로부터 카드를 받아야 하고,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관리자가 해당 시간만큼 월급에서 공제한다”고 진술했다.

해외 진출 기업의 CSR 현황이 파악되지 않는 것은 해당 기업들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법규나 시스템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지 공관장이 해외 진출 기업의 노동 법규 위반이나 부당한 행위를 감독해야 한다’는 외국환거래법상 의무 조항(제9조)마저 지난달 삭제됐다. 해외 진출 기업을 감시할 법적 근거가 사라진 것. 반면 같은 시기 중소기업의 사회적 책임경영을 의무화하는 규정(중소기업진흥에관한법률 제62조의 4)이 신설됐다.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대표는 “법상 대기업의 CSR을 모니터링 할 순 없고, 중소기업의 CSR은 감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면서 “코트라(KOTRA)·산업통상자원부·한국수출입은행·외교부 등 관련 기관들이 해외 진출 기업들의 CSR 현황을 모니터링하고, 이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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