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4일(화)

함께 달린 10㎞만큼, 편견의 거리도 짧아졌습니다

[김경하 기자가 간다] (4) 장애인 18명 질주한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

(위사진)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 출전한 손병기(왼쪽)씨와 박광문(오른쪽)씨. 시각장애인 선수들은 도우미의 팔에 끈을 연결하고 마라톤 구간을 달린다. (아래사진) 10㎞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오정윤(34·청각2급·왼쪽)씨와 동반주자로 참가한 조이슬(23·사랑의집 사회복지사)
(위사진)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 출전한 손병기(왼쪽)씨와 박광문(오른쪽)씨. 시각장애인 선수들은 도우미의 팔에 끈을 연결하고 마라톤 구간을 달린다. (아래사진) 10㎞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오정윤(34·청각2급·왼쪽)씨와 동반주자로 참가한 조이슬(23·사랑의집 사회복지사)

“레디… 셋… 고!”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휠체어 바퀴가 힘차게 굴렀다. 1일 오전 7시10분(현지 시각), 5만4000여명이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하려고 에스플레네드(Esplanade) 거리에 모였다. 10㎞ 코스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린 이들은 휠체어를 탄 선수 12명이었다. 30도에 육박하는 후덥지근한 날씨는 대회 열기를 한층 높였다. 이중 태극기를 단 한국 선수는 정종대(29·뇌병변1급), 이금천(34·지체2급), 최재웅(25·지체1급)씨. 뒤를 이어 목발을 짚고 레이스에 참가한 유일한 선수, 황윤천(46·지체2급)씨가 딸 황함지(18)양과 함께 했다. 지난달 29일부터 12월 4일까지, 한국장애인재활협회가 에쓰오일과 함께 마련한 ‘감동의 마라톤’ 프로젝트로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18명(시각1명, 청각4명, 지체5명, 지적3명, 자폐2명, 뇌병변3명)의 도전현장을 찾았다.

◇국제마라톤대회에서 만난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들

5㎞를 알리는 반환점을 돌자 20m 앞에 한 선수가 보였다. 속도를 점점 높여 힘껏 양팔을 돌렸다.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피니시 라인(finish line)을 2㎞ 정도 남기고, 드디어 앞 선수를 제쳤다. “브론즈 메달리스트, 종대 정!” 10㎞ 휠체어 부문 대회(보통 휠체어마라톤은 장애 등급별로 경쟁하나 싱가포르대회는 장애 등급과 상관없는 ‘오픈이벤트’로 진행됐다)에서 정종대씨는 33분23.85초로 3위를 차지했다. 정씨는 “정말 죽기살기로 뛰었다”고 귀띔했다. 대회 입상을 계기로 ‘한국장애인 선수들에게 국제무대 경험이 보다 쉽게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금메달을 딴 호주의 리처드 콜만(Richard Colman·25분53.86초)은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에서 엘리트 선수로 초청된 케이스다.

장애인 국가대표 운동선수에게 국제대회 경험은 ‘꿈의 무대’에 가깝다. 운동을 하면 일은 그만둬야 하지만, 실업팀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육상 국가대표 선수인 채창욱(32·뇌병변3급)씨는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전국체전이 1년에 5일 동안 열리는데 배려를 해주는 일터가 흔치 않다”며 “국제대회는 말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채씨는 2005년 교통사고로 오른쪽 신경이 마비되면서 재활로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균형을 잡지 못해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올해 100m를 12초대에 뛰면서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정보처리기술을 배워 경북 성주군청에서 장애인 편의시설 검사 및 관리직을 맡고 있다.

배드민턴 종목은 아예 미래세대가 없다. 현재 배드민턴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인 김선경(18·지체3급)군은 “배드민턴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지 못해 체육계에서도 신인 선수를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며 “장애인 체육계에서도 양궁, 사격 등 메달밭 종목과 그렇지 않은 종목 간의 지원 편차가 크다”고 했다. 김군은 오른손이 기형으로 태어나 대부분의 생활을 왼손으로 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유독 약했던 그에게 ‘배드민턴’은 체력을 키울 필수적인 운동이었다. 인기있는 종목만 관심과 지원을 쏟는 안타까운 현실은 장애인 체육계에서도 동일했다.

◇스포츠로 건강도 찾고, 자신감을 키워 사회를 향해 도전합니다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 휠체어 10㎞ 경기에 출전 한 참가자의 경기 모습.
싱가포르국제마라톤대회 휠체어 10㎞ 경기에 출전 한 참가자의 경기 모습.

정식 운동선수가 아닌 장애인들에게 ‘운동=생존’이었다.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컴퓨터 수리부문) 황윤천씨가 등산, 마라톤 등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작년부터다. 다리에 힘이 없는 그에게 체중 감량은 필수적이었다. 황씨는 이틀에 한 번 꼴로 경포 해변을 걷거나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10㎏ 감량에도 성공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 딸과 함께 참여했다. 황함지양은 아버지가 목발을 짚고 10㎞를 뛰는 동안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3m 거리를 두고 서포트했다. 황양은 “국내 대회에서는 100m 지점마다 걷다 쉬다를 반복했는데 이번엔 3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고 싶다’며 완주한 아빠가 대단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이도 있다. 하프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박광문(37·시각1급)씨의 옆에는 손병기(44·에쓰오일 분해3부 정유3과 대리)씨가 항상 함께 했다. 박씨의 눈이 되어준 것. 에쓰오일의 마라톤 동호회 봉사활동으로 동반주자 역할을 줄곧 해왔던 손씨지만 이번 일정은 남달랐다. 그는 “6일 동안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며 장애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며 “신체장애가 능력의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번 대회 참가를 기획한 장영근 장애인재활협회 사회복지사는 “몸이 불편하거나 자신감이 부족해 집에만 있는 장애인을 밖으로 끌어내 건강을 증진하고 스포츠를 통해 사회와 어울리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감동의 마라톤’은 에쓰오일이 매년 주최한 사회공헌 사업으로 장애인에게 3개월간의 마라톤 훈련과 이들의 국제무대 도전, 해외 관광을 지원한다. 정백조 에쓰오일 상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장애인 선수들의 도전이 매년 감동이 된다”면서 “각박한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감동의 스토리가 계속해서 확산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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