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상속세 12조원. 지난 29일 발표된 이건희 회장의 상속세다. ‘정직하게 국민이 납득할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신념대로 유족들은 담담히 세금 납부와 사회 환원 결정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 3년치(2017~2019년) 상속세 수입(10조6000억원)보다 많은 돈이 한 번에 세수로 확보되니 정부 입장에서는 대환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최선일까. 다른 나라의 부자들은 상속세 대신 기부를 선택해 엄청난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는데 왜 우리는 세금일까. 만약 ‘사상 최고의 기부금 12조원’이 됐다면 어땠을까.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장자(莊子)가 조릉의 정원에서 까치 사냥을 했는데, 까치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까치는 사마귀를, 사마귀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함을 두고 한 말이다. 미국, 영국 등 기부가 활성화된 나라에서는 당장 정부의 세수가 줄더라도 세금 감면 등 장기적으로 기부를 활성화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한 치 앞을 못 보는 것 같다.
기부는 항상 우리 역사에 중요한 변화 동력이 돼왔다. 한강의 기적, IMF와 코로나 위기, 모두 기부의 현장이 됐다. 지금도 기업, 자산가, 개인 기부자를 막론하고 ‘기부 DNA’를 가진 착한 사람들이 사회 빈틈을 메우고 있고 기부가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십일조를 떼놓듯 ‘내 이윤의 일부는 사회 환원을 하겠다’는 정서도 생겼다.
민간 활동은 점점 더 다양해지며 내용도 세밀해지고 영역도 확장되고 있다. 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모든 곳에 민간의 유능한 인력과 재정이 개입된다. 돈과 가치가 형성되는 곳, 즉 시장이 있으면 어디든 기부가 따라다닌다. 현금뿐 아니라 제품, 식품, 소프트웨어, 주식, 부동산, 미술품, 재활용품까지 그 내용도 다양하다.
이런 변화에 비해 우리 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기부 정책은 연간 겨우 14조원 내외로 계수되는 국세청 기부금 통계의 논리 안에 갇혀 있다. 2013년 기부금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꿔 고액 기부 혜택을 줄였고, 기업의 주식 기부 폐해를 줄이겠다고 세금공제한도(총발행 수의 5%)를 박하게 정했다. 이를 잘 모르고 기부했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사례도 늘었다. 수원교차로 황필상 박사, 오뚜기 함태호 명예회장, 김신 참모총장 등의 사례는 우리 조세제도의 폭력성을 잘 보여줬다. 비영리와 소셜 분야의 경제적 효과가 국민경제에 얼마나 차지하는지 통계도 없고 정책도 없다. 기부에 대한 장려는 고사하고 세금 폭탄을 맞지 않으면 다행인 희한한 나라가 우리 현주소이다.
기부가 활성화되려면 기부자들이 신나야 한다. 상속세율은 세계 최고 수준(50%)이고, 기부를 하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인데 누가 기꺼이 기부를 할까. 엄청난 돈을 사회로 환원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삼성가의 상속세 납부와 사회 환원 결정, 김봉진·설보미, 형미선·김범수 부부의 유산 기부 약정은 우리 사회가 곧 변혁적 기부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신호탄과 같다. 이미 민간의 단체들은 기부 문화를 업그레이드하고 있고, 한국모금가협회에서는 각 분야 모금 전문가들이 모여 민간의 자율적 기부 투명성 향상 방안, 유산 기부 전문가 양성, 유산 기부 연구회 운영 등 미래 사회를 위한 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사회 발전은 제도로 안착돼야 한다. 오랫동안 정부 각 부처 간 사일로(silo)와 공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공무원들의 잦은 부서 이동이 공익제도를 후퇴시키는 주된 이유로 지적돼 왔다. 이제는 정부에 통합된 공익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용기 있는 사회 공헌들이 우리 사회의 빛나고 값진 자산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를 격려하고 장려하는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나는 새해가 되면 유서를 쓴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