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위, 국내 매체에 제재 요청 ‘0건’
오픈채팅방서 성착취물 공유되지만
신고 들어와야 조치… 피해만 키워
성범죄 필터링 의무화… 실효성 ‘글쎄’
방통위 “국내 기업 규제 조심스럽다”
‘0건’.
지난 2017년부터 디지털성범죄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카카오톡·라인·아자르 등 국내 메신저 앱에 대한 성 착취물 자율 규제를 신청한 횟수다. ‘n번방’ 사태 발생 이후 방심위가 텔레그램과 디스코드 등 해외 메신저 앱에 성 착취물 삭제를 요청하긴 했지만, 성 착취물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카카오톡·라인 등 국내 메신저 앱이나 아자르·즐톡 등 랜덤채팅 앱에 대해서는 단 한 건의 제재도 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방송·통신 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제재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역시 국내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성범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3일 정부의 ‘디지털 성범죄 근절 대책’ 발표에도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까진 갈 길이 멀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유사 n번방 넘쳐나는데… 방심위 “신고 없어서 몰랐다”
시민단체인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지난달 자체 모니터링으로 확보한 카카오톡 오픈채팅 내 ‘유사 n번방’ 증거 자료를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 넘겼다. 이들이 확보한 캡처 화면은 수백 장에 달한다. 대화 속 가해자들은 미성년자로 추정되는 피해 여성들의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면서 “텔레그램은 난리 났어도 여긴 안전하다”고 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의 김보람 상담원은 “텔레그램이 주목받자 일부 가해자 사이에서는 카카오톡이나 라인 같은 국산 앱이 더 안전하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신고로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가 수사에 착수한 지 한 달이 넘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전담 부서인 디지털 성범죄 심의지원단과 신고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는 방심위는 카카오톡에서 피해가 발생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방심위 관계자는 “카카오톡을 포함해 국내 기업에 자율 규제를 요청한 적은 없다”고 답했다. 카카오톡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직접 신고한 피해자가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추후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신고가 들어오면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신고가 들어오면 심의한다’는 부분이다. 성폭력 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유포된 영상물인 경우 당사자 신고 없이도 처벌이 가능하다. 방심위 관계자는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 공개된 영상물인지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절차가 본인 신고”라며 “자발적으로 공유한 영상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피해자 지원 활동을 오랜 기간 해온 시민단체들은 “주무기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온라인 성 착취가 끊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우선 당사자가 피해 사실을 모르는 경우 신고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니터링을 하는 시민단체가 의심스러운 대화나 콘텐츠를 신고하더라도 가해자가 채팅방이나 SNS상에서 프로필 사진을 피해 여성으로 설정하고 ‘내 영상을 공유한다’고 하면 피해가 입증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방심위의 소극적인 법 해석이 피해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 공동대책위원회(아청법 공대위)에서 활동하는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영상이 온라인상에 한 번 퍼지면 걷잡을 수 없는데 피해자가 ‘본인 의사에 반한 유출’임을 입증하다가 피해가 커지고, 입증 과정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며 “성적인 동영상의 경우, 본인 의사에 반한 유출 여부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판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성범죄 차단 기술 없인 문제 해결 못해”
정부 차원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겠다”며 관계부처 합동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이번 정부 대책에는 ▲처벌 강화 ▲경찰의 잠입 수사 도입 ▲성매매 ‘대상 청소년’ 개념 삭제 ▲의제강간 연령 상향 ▲성 착취물 구매·소지 행위 처벌 ▲범죄 수익 몰수 ▲선 삭제 후 심의제 도입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방심위 측은 ‘선 삭제 후 심의제 도입’으로 조치 기간이 단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방심위가 국내 앱에서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원인이 된 ‘피해자 신고 원칙’은 그대로다. 시민단체들은 “삭제 처리 속도가 빨라지더라도, 신고가 들어와야 절차가 시작된다는 점은 같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방통위·방심위에 수년간 요구해 온 채팅 서비스 제공 사업자에 대한 기술 규제 의무화 내용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이번 대책에 ‘채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내 사업자에게 디지털 성 착취물 삭제·필터링 기술 조치를 의무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방통위·방심위가 성 착취 피해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어느 선까지 규제할지 여러 입장을 살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국내 메신저 앱에서의 성 착취도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며 “영세한 기업에까지 성범죄 방지 기술 도입을 의무화하면 기업 부담이 클 수 있어 기업 규모에 따라 의무화 조치를 차등하고, 처벌 조항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추후 검토하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아청법 공대위 측은 “정부의 의지는 높이 사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 마련을 위해서는 모니터링 강화와 기업 기술 조치 의무화가 꼭 필요하다”며 “공대위 소속 전문가·단체와 함께 실효성 있는 정책 마련을 위한 제안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