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나눔 후엔… 상한 김치와 연탄재만 남아

‘보여주기식’ 겨울철 사회공헌 실태

나눔의 폐해
건강상태나 환경 무시한 김장 담그기·연탄 나르기
사진만 찍고 가는 행사 진행과 다름없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
기업 인근은 김치 ‘초과’, 다른 지역은 ‘미달’ 초래

수혜자 배려한 해법은
기업과 복지기관 연계해 정확한 수요 파악하고
사전에 활동 조율해야

“어차피 못 먹는 김치 말고, 자주 들러서 말동무해 줄 사람이나 보내줘.”

김명순(77·가명)씨가 냉장고 문을 열고, 하얀 통을 가리켰다. 지난해 겨울, 복지기관 두 곳에서 받은 김치 20㎏이었다. 1년 동안 손도 안 댔다. “간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너무 짜서 입에도 못 댔어. 의사가 당뇨가 심하니까 짠 음식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차라리 쌀이나 이불 좀 보내주지.” 김씨는 매년 겨울 김치를 배달하는 봉사자들에게 ‘쌀이나 간병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변함없이 못 먹는 김치만 냉장고에 쌓여간다.

김명순(77·가명)씨가 냉장고 문을 열자, 먹지 않은 김치 통이 쌓여있다. 김씨는 “당뇨 때문에 김치를 많이 못 먹는데, 쌀이나 간병인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명순(77·가명)씨가 냉장고 문을 열자, 먹지 않은 김치 통이 쌓여있다. 김씨는 “당뇨 때문에 김치를 많이 못 먹는데, 쌀이나 간병인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여주기식 겨울철 기업 사회 공헌

최근 서울의 한 장애인복지관은 유명 중소기업으로부터 “300만원 후원금을 보낼 테니 김장 담그기 행사를 진행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이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꼭 사진에 담아야 한다”는 요청도 덧붙여졌다. 전화를 받은 사회복지사는 “300만원으로는 김치를 줄 수 있는 가정이 50곳밖에 안 되는데, 대상자 선정도 어렵고, 괜히 어르신들끼리 싸움만 난다”고 거절한 이유를 밝히며 “결국 돈 줄 테니 사진 찍고 홍보 되는 행사 열어달라는 소리”라고 하소연했다.

매년 겨울이 되면, 기업 사회공헌의 단골 행사로 ‘김장 담그기’와 ‘연탄 나르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정작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수혜자 고려 않는 보여주기식 사회공헌이 되고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노인복지관에서 일하는 한 사회복지사는 “요즘은 기업이 직접 사온 김치를 복지관에 쌓아두고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면서 “어르신 가정 2~3곳을 섭외해 김치 전달 사진만 찍고 돌아가기 때문에, 정작 배달은 고스란히 사회복지사들의 몫”이라고 귀띔했다. ‘연탄 나르기’ 행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업이 트럭에 연탄을 실어 배달하지 않고, 임직원들이 일렬로 서서 연탄을 손으로 나른다.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연탄 나르기’ 봉사를 진행한 대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연탄을 놓쳐서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바닥에 비닐을 깔지도 않고 손으로 나르다 보니, 그 지역 일대가 더러워지더라”면서 “주민들에게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난방비 지원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겨울철 김치 나눔도,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

기업의 ‘김장 담그기’ 행사가 모든 지역에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서초·강남 등 기업이 밀집한 지역에는 독거노인 한 명당 3~4통의 김치가 돌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많다. 실제로 노인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도 수원시의 경우, 김치가 부족해서 문제다. 수원시의 한 복지관 사회복지사는 “김장 담그기를 하고 싶어도 후원 기업을 찾기 어렵다”면서 “‘서울복지관에 남는 김치를 수원에 배송해줄 수 없느냐’고 문의해보니, 서울지역 복지관의 남은 김치를 다 모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보관도 쉽지 않아 김치가 다 쉬어버리기 때문에 어렵더라”고 말했다. 결국 남는 김치는 버려지게 된다는 게 이 복지사의 설명이다.

공기업의 한 사회공헌 담당자는 “강서나 강북에서 김장 담그기 행사를 진행했는데, 김치가 모자라 못 받은 어르신들이 섭섭해하더라”면서 “해당 복지관과 협의해서 모든 분께 겨울용 방한복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반면, 매년 2통 이상 김치를 받아온 이들은 남은 김치를 처분하기 바쁘다. 서울의 한 노인복지관 사회복지사는 “김치 한 통은 미리 자녀에게 보내놓고, 김치가 어련히 또 오겠거니 기다리신다”면서 “김치가 한 통만 배달되는 해에는 ‘김치 더 달라’며 찾아오는 어르신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겨울철에만 후원이 집중되는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부 지역에선 복지기관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꾸려 중복 없이 골고루 김치가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 민간기관, 종교단체 등의 지원 동향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일부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은 “기업의 김장 담그기 행사가 지역구 구청장·국회의원의 ‘어르신 표심 잡기’로 활용되기도 한다”면서 “김치가 몰리는 지역을 보면, 김장 담그기 행사에 지역구 구청장·국회의원이 어김없이 소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수혜자 배려한 세밀한 기업 사회 공헌 이뤄져야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지역사회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사회복지기관들과 기획부터 함께해야 한다”면서 “복지기관은 수혜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업과 사회공헌 활동을 사전 조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11월 초, 대기업 사회 공헌 담당자로부터 ‘김장 담그기’ 행사를 요청받은 국내의 한 NGO는 긴급 미팅을 제안했다. 김치 외에 생필품을 지원하자는 NGO의 제안을 기업이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NGO 실무자는 수혜자를 관리하는 해당 복지관 실무자와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의 미팅을 주선했다. 이 실무자는 “사회복지사로부터 직접 현장 상황을 들은 기업 담당자가 어르신들께 생필품을 지원하기로 마음을 바꿨다”면서 “충분히 소통만 하면 불필요한 지원으로 인적·물적인 재원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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