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시민자산화 이룬 ‘해빗투게더협동조합’
‘조물주 위에 건물주.’ 건물 소유주가 신(神)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나오는 시대에 ‘서울 건물주’가 된 사람들이 있다. 매입가 33억원. 위치는 최근 몇 년 새 강남권만큼 몸값이 치솟은 ‘마포’다. 지상 5층짜리 빌딩의 소유주는 ‘해빗투게더협동조합’(이하 해빗투게더). 임차료 상승으로 원주민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경험한 주민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다.
시작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날마다 치솟는 임차료를 견디지 못하고 마포 이곳저곳을 떠돌던 주민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우리가 건물주가 되자’는 맹세를 한다. 조금씩 돈을 내서 건물을 사버리자는 계획을 세우고 조합을 세웠다. 건물을 사유(私有)하지 않고 공유(共有)하겠다는 해빗투게더의 약속에 시민 303명과 단체 39곳이 힘을 보탰다. 2020년 11월 27일. 잔금을 치르고 건물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받은 날이다. 건물에는 ‘모두의놀이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합원뿐 아니라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이용 가능한 놀이터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높은 임차료에 내몰린 마포구 주민들, 건물주 되다
해빗투게더는 대표적인 ‘시민자산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시민자산화는 지역 주민들이 함께 투자해서 토지나 건물 등 지역사회에 필요한 자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15일 내부 단장을 마치고 공식 개방한 모두의놀이터에는 이미 마포 주민들이 그들의 자산을 누리고 있었다.
해빗투게더 조합원들은 출자금과 크라우드펀딩으로 3억원을 모았다. 여기에 지난해 행정안전부 ‘지역자산화 지원사업’과 서울시 ‘민간자산 클러스터 융자지원사업’에 잇달아 선정되면서 대출 보증 지원을 받아 나머지 30억원을 채울 수 있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시민들의 힘으로 건물을 마련하겠다는 고집 때문이다. 박영민 해빗투게더협동조합 상무이사는 “시민자산화의 핵심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라며 “지역 주민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데 소수의 사람이 참여하면 오래도록 지속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시민자산화를 주도한 건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삼십육쩜육도씨의료생활협동조합,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등 세 단체다. 우리동네나무그늘은 염리동에서 카페이자 지역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간을 운영한 지 5년째 되던 2016년, 건물주의 갑작스러운 임차료 인상 요구에 오랜 둥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소영 우리동네나무그늘협동조합 이사장은 “건물주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290만원이었던 임대료를 보증금 1억원에 월세 350만원으로 갑자기 올려버렸고 명도소송에도 휘말렸다”고 말했다. 우리동네나무그늘은 결국 소송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났다. 한 이사장은 “이때부터 시민을 위한 공간을 소유해야 비극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삼십육쩜육도씨의료생협은 환자를 3분 만에 진료하던 기존 관행을 깨고 30분 진료 원칙을 지키며 마포구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왔다. 하지만 이들도 임차료 상승으로 진료실을 홍대에서 연남동으로, 다시 대흥동으로 옮겨가야 했다. 홍대 앞을 무대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들은 젠트리피케이션 탓에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정문식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이사는 “음악가, 공연기획자, 미술인 등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하던 홍대 앞 공연장, 공방 등이 지가 상승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합을 설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우리동네나무그늘이었다. 우선 2017년 5월 해빗투게더의 전신인 ‘우리동네 지역자산화 태스크포스(TF)’가 결성됐다. 시민자산화를 시작하려니 국내에는 개념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같은 해 9월 TF는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의 ‘마을활동가 국외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 런던으로 9박 10일의 연수를 떠났다. 영국에서 지역공동체의 시민자산화를 돕는 중간 지원 조직인 ‘로컬리티’를 비롯해 아이비하우스 펍, 브릭스턴그린, 패딩턴개발신탁 등 시민자산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직접 보고 국내 모델을 설계했다.
지역 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모두의놀이터’
먼저 시민자산화를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박영민 이사는 “2018년 1월에 첫 제작발표회를 열었는데 고맙게도 주민 40여 명이 참석해줬다”고 말했다. 해빗투게더라는 이름도 이때 발표회 제목인 ‘해피 투게더, 해브 잇 투게더(Happy together, Have it together)’에서 따왔다. 이후 콘퍼런스, 콘서트, 펍, 포럼 등의 형태로 십수 번의 공론장을 열었다.
해빗투게더는 2018년 당시 시민자산화라는 국내에 전례 없던 사업을 진행하려다 보니 바닥부터 모든 것을 공부해야 했다. 법, 재무, 부동산 등 전문가들을 찾아가 시민자산화에 적합한 조직 형태가 무엇인지, 상권을 분석하는 방법, 예상 수익 계산법 등을 배워나갔다. 덕분에 해빗투게더 이사진은 다들 부동산 준전문가가 됐다. 박 이사는 “이제는 다른 지자체에 시민자산화 강연을 나갈 정도로 노하우를 쌓았다”고 말했다.
2019년 해빗투게더협동조합은 조합 설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건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이곳저곳에 발품을 팔았다. 건축·설계 전공이나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을 모아 건축위원회도 만들어 공간 구상도 함께했다. 박 이사는 “매입하려고 봐뒀던 건물을 남이 먼저 채 간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며 “대부분 건물도 보지 않고 시세 차익만 노리는 부동산업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나날이 오르는 건물 시세도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건물을 찾는 데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현재 모두의놀이터에는 2층과 3층에 각각 카페와 코워킹스페이스가 조성됐다. 코워킹스페이스는 멤버십에 가입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조합원에게는 출자금에 비례해 ‘히트코인’이라는 포인트도 지급된다. 포인트는 모두의놀이터에서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지하엔 전시나 공연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1층엔 펍, 5층에는 파티룸 등을 계획하고 있다.
2층 카페는 우리동네나무그늘이 운영하고 있다. 한소영 이사장은 “앞으로는 쫓겨날 걱정 없이 공간을 운영할 일만 남아 속이 편하다”고 말했다. 3층 코워킹스페이스의 공동 운영을 맡은 마포사회적경제네트워크의 구은경 이사장은 “마포에 있는 많은 사회적경제조직들도 계속해서 임차료 때문에 밀려나고 있다”며 “모두의놀이터에 사회적경제조직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서 기쁘다”고 말했다.
조합원들은 “해빗투게더의 시민자산화는 아직 종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앞으로 조합원 수를 늘리고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시민 중심의 자본 비율을 꾸준히 높여 나갈 예정이다. 한번 고지를 오르니 다음 고지도 눈에 띄었다. 해빗투게더는 1~2인 가구를 위한 공동체 주택을 다음 시민자산화 목표로 잡고 있다. 건물은 최대한 마포구 혹은 인접한 구에 있는 곳으로 알아보는 중이다. 박영민 이사는 “마음껏 놀 수 있는 상가에서 마음껏 쉴 수 있는 주거 공간까지 시민자산화를 퍼트려 나가고 싶다”며 “다른 지역의 시민들도 우리 사례를 보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우리들의 공간’을 만들도록 계속해서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강 더나은미래 기자 riv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