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두산의 한 임원을 만났는데, 명함을 새로 주면서 “바뀐 걸 한번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사회공헌팀에서 CSR팀으로 이름이 바뀌었기에, 축하와 격려를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은 ‘그게 그거 아냐?’라는 반응이 많다”고 웃었습니다. 두산은 지난해 박용만 회장이 10년 가까이 공들여 완성한 ‘두산웨이(Way)’를 전파하는 데 한창이었습니다. 임원의 휴대폰에 저장된 두산웨이를 한번 읽어봤습니다.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두산’을 만들기 위한 아홉 가지 핵심가치를 보고 약간 놀랐습니다. 인재, 정직과 투명성, 고객, 사회적 책임, 안전과 환경…. CSR의 세계표준인 ISO 26000 일곱 가지 핵심 가치와 거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박용만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나서서 CSR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각 계열사 CEO들에게 CSR을 독려한다고 합니다.
지난 10일 열린 ‘더나은미래’의 콘퍼런스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CEO가 관심 없으면, 아예 CSR을 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습니다. CSR을 제대로 하기란 참 쉽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대목이었습니다. 한 대기업 CSR 팀장은 “사회공헌은 그나마 부드럽지만, CSR에서 다루는 지배구조·노동 관행·공정거래·환경 등은 한결같이 예민하고 민감하지 않으냐”며 “일개 부서장이 어떻게 조직 내에서 이런 문제를 쉽게 거론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새 정부 출범 초기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사법기관 등이 나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압박을 세게 합니다. ‘정권 말기가 되면 기업이 말을 듣지 않으니, 힘이 있을 때 밀어붙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지난 17일, 재계 2위인 현대차가 “물류와 광고 물량의 절반을 중소기업 등 외부 업체에 개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보면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지난해 한 소규모 회사의 회계팀장이 저에게 “재계 1~2위인 삼성과 현대차가 6개월치 어음을 끊고, 계열사인 제일기획과 이노션을 통해 광고를 대행하면서 15% 수수료를 거저 주고 있다”며 분노하던 게 떠올라서입니다. 현대차의 자발적인 발표인지, 외부 압력에 의한 발표인지 좀 궁금해졌습니다.
2주 전 ‘더나은미래’의 설문조사 결과, 100대 기업 CEO 다수는 “CSR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했습니다. 진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기업은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CSR에 나설 것입니다. 말고기 파동을 혹독하게 겪은 유럽 기업은 이제 협력 업체와의 거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매출 수치만이 아니라, CSR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겪는 ‘숨어 있는 비용’의 중요성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만약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는 CEO라면, ‘가짜 CSR’이 아니라 ‘진짜 CSR’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