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을 몇 개월 동안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언론에 짤막하게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소문’의 진원지를 후속 취재할 길이 없어 사건은 묻히는 분위기였습니다. 며칠 후 유흥주점 종업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언론사가 이를 집중보도하면서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습니다. 로비를 받고, 늑장수사와 수사중단을 지시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며 ‘법치국가’ 대한민국을 비웃는 듯한, 대기업 오너의 삐뚤어진 행태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도, 올해에도 계열사 자금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태광, SK 등 대기업 총수가 구속되는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높아지자, 일부에서는 반대 목소리도 제기됩니다. “기업의 진정한 책임은 이윤 창출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고, 일자리를 늘려 고용을 잘하는 것 아니냐” “선진국은 기업 사회공헌 비율이 우리보다 훨씬 낮다” 등의 주장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사이 유독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 조지아대 캐롤 교수는 CSR의 4단계 책임론으로 유명합니다. 1단계는 경제적 책임으로,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해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 법적 책임으로, 공정한 규칙 속에서 법을 준수하며 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단계는 윤리적 책임인데, 기업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주민,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기준,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단계 자선적 책임은 경영활동과 관계없이 기부나 사회공헌 등을 통해 사회로부터 얻은 이윤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단계(법적 책임)와 3단계(윤리적 책임)를 거치지 않은 기업이 아무리 4단계(자선적 책임)에 집중한다고 해도, 일반 국민들은 이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난해 ‘더나은미래’가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사회공헌에 대해 ‘못한다”아주 못한다’는 부정적인 응답이 63%에 달했습니다. 기업들은 왜 우리나라가 유독 반기업 정서가 높아졌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국민 정서’란 한순간에 생기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6년 비자금 사건으로 1조원 규모의 사재출연을 약속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현재까지 6500억원을 기부했습니다. 2008년 삼성 특검 수사 당시 이건희 회장은 차명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했지만 그 뒷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차명재산을 둘러싼 소송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와의 약속을 지키고, 법과 윤리적인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늘어나면, 30년 후, 아니 빠르면 10년 후에 반기업 정서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CSR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 점에서 무척 반갑고도 고마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