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로컬퓨처스 대표
1975년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73)가 히말라야 인근의 인도령 ‘라다크(Ladakh)’ 지역을 방문한 건 라다크 토착어와 민담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라다크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티베트 불교에 뿌리를 둔 전통문화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온 곳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일상에 필요한 물자 대부분을 지역 안에서 조달하면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라다크의 평온한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서양 물건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라다크를 드나들면서부터다. 비행기가 싣고 온 물건들은 라다크 땅에서 생산된 것보다 더 쌌다. 비행기가 오가는 횟수가 늘면 늘수록 라다크 지역 경제는 무너져갔다. 전에 없던 실업자가 생겼고, 빈곤이 사회 문제로 자리 잡게 됐다.
노르베리 호지의 인생도 크게 바뀌었다. 7개국어를 구사하는 유능한 언어학자의 길 대신 반(反)세계화, 지역화(localization) 운동가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는 비영리단체 ‘로컬퓨처스(Local Futures)’를 세우고, ‘오래된 미래’ ‘허울뿐인 세계화’ ‘로컬의 미래’ 등의 책을 쓰며 세계화의 폐해와 지역화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데 앞장서왔다.
국내 행사 참석차 한국을 찾은 노르베리 호지 로컬퓨처스 대표를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40여년 동안 라다크를 비롯해 세계 곳곳의 지역 경제가 ‘세계화’ ‘경제 성장’이란 이름 아래 붕괴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며 “하지만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이 상황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최근 로컬퓨처스는 국제 무역의 비효율적 측면을 알리는 짧은 영상 ‘인세인 트레이드(insane trade, 비상식적인 무역)’를 만들어 공개했다. 영상을 보면 미국과 영국은 감자, 우유, 쇠고기 등 식료품을 매년 수십만 톤 수출하고 거의 같은 양을 다시 수입하고 있다.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제 무역이 비용을 절감하고 더 많은 이윤을 남긴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국제 무역은 여러 국가가 각자 비교우위가 있는 재화를 교환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근거로 발전했다. 정부에서도 국제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무역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거금을 쓰고, 장거리 운송에 필요한 화석연료 보조금을 지급하고, 국제무역을 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감세 정책을 펼쳐왔다. 이런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들은 자국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인건비가 싼 나라로 수출해 그곳에서 가공한 후 이를 다시 수입하고 있다. 이는 장거리 운송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물질, 화석연료 낭비 등과 같은 환경적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완전히 미친 짓(absolutely crazy)이다.”
―‘인세인 트레이드’가 지역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
“국제 무역은 지역 기반 산업 체계를 점점 더 단일화·기계화한다. 양배추, 사과 등 다양한 작물을 소량 재배하는 농부를 떠올려보자. 그가 키운 작물이 대기업에 납품될 수 있을까? 대기업에 농작물을 납품하려면 농부들은 다품종 소량 생산이 아니라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을 택해야 한다. 단일 경작 체제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결국 이 농부가 사과만 재배하기로 했다고 치자. 이제 그는 사과의 크기와 모양과 무게를 규격화하기 위해 온갖 화학 약품을 동원하고, 사과를 세척하고 포장하기 위해 여러 기계를 사들인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사과는 엄청나게 긴 유통 체인을 따라 전 세계로 수출된다. 이런 상황은 지역 농업을 붕괴시킬 뿐만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 낭비를 초래한다.”
―지역 중심의 경제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식량 자원이 지역 안에서 충족될 수 있도록 지역 농업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지역 중심 농업 체제가 복원돼야 지역 경제, 지역 사회가 회복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농업은 대규모로 산업화한 농업이 아니라 과거의 다품종 소규모 농업이다. 한 농장에서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이 농작물이 지역 안에서 소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지자체의 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로컬 제품을 적극적으로 사는 소비자 역할도 중요하겠다.
“물론이다. 나 또한 일상에서 로컬 제품 중심으로 구입하고 있고, 특히 식료품은 대부분 지역에서 난 것들을 산다. 하지만 로컬 제품 소비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행동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로컬 제품들은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로컬 제품을 사라고 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이 지역 생산 체계 복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나는 사람들이 공동 행동에 나서 정책 결정자들을 움직이길 기대하고 있다. 지역 농업, 지역 생산 에너지, 지역 금융 등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를 확충하는 정책적 기반이 마련되면 지역에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고, 삶의 질도 향상될 수 있다. 또 로컬 제품의 가격도 낮아져 더 많은 소비자가 로컬 제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책 ‘로컬의 미래’에서 강조한 ‘빅 픽쳐 액티비즘(Big picture activism)’인가.
“그렇다. 책에도 썼듯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결정적 다수를 만드는 것이 빅 픽쳐 액티비즘의 목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문제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것, 인식(awareness)을 고취하는 것이다. 방식은 여러 가지다. 알리고자 하는 이슈를 둘러싼 소식들을 담은 뉴스레터를 발행하거나, 짧은 영상물을 제작하거나, 노래 또는 공연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동시에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상황을 변화시키려 하는 조직이나 행동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 빅 픽쳐 액티비즘은 작아서 또는 가려져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현실이 드러나도록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한승희 더나은미래 기자 heehan@chosun.com]
–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