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시각장애인 운전체험 동승기
“저 계속 가도 돼요? 벽에 부딪히려는 건 아닌가요?” (시각장애인 정찬우 씨)
“괜찮아요, 아직 직진이에요. 저도 핸들을 잡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근데 곧 좌회전이니 속도를 줄일게요.” (태지원 서부면허시험장 과장)
앞이 보이지 않는 전맹 시각장애인 정찬우 씨가 오른쪽 발로 조심스럽게 자동차 엑셀을 밟았다. 조수석에 앉은 비장애인인 태지원 서부면허시험장 과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정 씨를 안심시키면서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아 운전을 도왔다.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태 과장은 바로 조수석에 있는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였다.
정 씨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경사로에서는 엑셀을 밟고 신호등 앞에서는 잠깐 멈추며 주차를 뺀 면허시험장 코스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타인이 태워주는 차를 타는 것이 훨씬 익숙한 정 씨지만, 오늘만큼은 직접 운전하는 차로 면허 시험장을 네 바퀴나 돌며 15분 동안 도로를 맘껏 누볐다.
이곳은 지난 15일 시각장애인 운전체험 행사가 열린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이 주최하고 도로교통공사가 지원하는 운전체험은 2021년부터 매년 장애인의 날(4월 20일)에 열리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지정한 날인 ‘흰 지팡이의 날(10월 15일)’을 기념해 한 번 더 진행하게 됐다.
운전체험은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의 대형면허 기능시험장을 활용한다. 도로에 사람이나 차도 없고, 폭도 널찍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
신동선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스포츠여가지원팀장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버킷리스트를 물어봤을 때 ‘운전’이라고 답한 분들이 많았다”면서 “자면서 운전하는 꿈을 꾸는 분도 있다고 전하신 분도 있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6명이 참여하는 직전 행사에도 25명이나 지원했다. 이번에는 전 행사에 아쉽게 떨어진 시각장애인 6명이 참여했다.
본격적인 운전에 앞서, 면허시험장 본관 1층에 마련된 운전면허 시뮬레이터로 운전 방법을 먼저 배우는 시간이 주어졌다. 참가자들은 차 내부를 손으로 짚어보고 직접 작동시켜 보며 기능을 하나하나 익혔다.
핸들과 기어의 위치 파악부터 페달과 브레이크를 밟을 때 발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부면허시험장 관계자가 “운전할 땐 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한 발로 해야 한다”는 안전 수칙도 전해줬다.
한 명당 15분 가량의 짧은 시뮬레이션이 끝난 후, 대형면허 기능시험장에서 본격적으로 운전 체험이 이어졌다. 시험장까지 가는 길에 실로암복지관 직원들은 “지금 엑셀에서 발을 뗐는데도 10km/h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니 엑셀은 조심히 밟아야 한다”며 조언했다.
널찍한 시험장에는 노란색 시범차량 세 대가 나란히 있었다. 차 한 대를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두 번씩 번갈아 가며 운전하는 방식이다. 옆자리에는 운전 베테랑인 서부면허시험장 직원들이 동승했다.
기자도 차 뒷자리에 함께 올라탔다. 운전자는 정찬우(29) 씨와 김병현(36) 씨다. 정찬우 씨는 전맹이고, 김병현 씨는 3m 안쪽의 사물까지만 볼 수 있는 약시다.
운전체험은 조수석에 앉은 태지원 과장의 목소리 안내로 시작했다. 첫 번째 운전자인 정찬우 씨가 양 손으로 잡은 핸들을 태지원 과장도 함께 잡아 차량이 도로선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제 좌회전 코스 시작해요.” (태지원 과장)
정 씨는 긴장한 탓에 어깨가 한층 위로 올라갔다. 속도를 살짝 줄이고, 두 사람은 손을 겹쳐 잡아 핸들을 왼쪽으로 끝까지 돌렸다. 결과는 깔끔한 성공.
벽에 부딪힐까봐 걱정하던 모습도 잠시, 정 씨는 가속구간에서 속도를 45km/h 까지 올렸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시원한 가을 바람이 들어왔다. 함께 뒷자리에 타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김병현 씨도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빙을 즐겼다.
“여기서 멈췄다가 갈게요” 안내에 맞춰 정 씨가 출발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자,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멈췄다. 차가 크게 덜컹거렸고, 몸은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 초보 운전 차량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급정차의 묘미랄까.
두 번째 바퀴는 훨씬 편안한 승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출발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 한 바퀴를 도는데 걸렸던 시간도 4분에서 2분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앞서 운전 팁을 전해 들은 김병현 씨도 안내에 따라 차근차근 차를 몰았다. 귀로 들으며 시험장의 코스를 외운 듯 좌회전 구간과 가속 구간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첫 운전부터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태지원 과장은 “처음 운전하는 거 맞아요?”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는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부드러운 운전으로 실로암복지관 직원들에게 ‘베스트 드라이버’ 호칭을 얻은 양점하(59) 씨는 ‘짱!’이라고 말하며 양 엄지를 치켜들었다. 양점하 씨는 “이렇게 좋은 가을 날씨에 평생 해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경험을 죽기 전에 할 수 있다니 너무나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인자 활동보조사는 “장애인분들이 다들 기분이 한껏 올라간 게 느껴져 덩달아 기뻤다”며 “함께 다니는 분(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하시는 차 옆에 탔다는 게 매우 특별한 기억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함께 시각장애인도 운전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정찬우 씨는 “하루빨리 자율주행 자동차가 발달해 우리 시각장애인도 운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태지원 과장 또한 “기술이 빨리 발전해 우리 장애인분들의 이동권이 보장되길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yev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