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利주민] 한국 수어 하는 일본인, 후지모토 사오리
평창 페럴림픽 홍보대사 참여 후
수어에 관심 갖고 제대로 공부
외국인 첫 수어통역사 필기 통과
K팝 수어 영상 만들어 알리기도
‘농인(聾人)’의 사전적 의미는 ‘청각장애로 인해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농인들은 스스로를 ‘보는 행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일본의 농인 작가 사이토 하루미치는 농인들을 ‘보는 문화권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농인들의 문화를 ‘농문화’라 부르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대신 청인(聽人)과 농인으로 구분한다. 수화(手話)가 아니라 수어(手語)로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이런 구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수어를 배우는 청인은 많지 않다. 그런데 지난 7월, 국내 최초로 수화통역사 필기시험을 통과한 외국인이 나왔다. 주인공은 일본 요코하마 출신 방송인 후지모토 사오리(32). 유엔 해비타트 한국위원회와 행정안전부, 2020 한일 축제 한마당 등 여러 분야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사오리는 유창한 한국어로 “코로나19로 실기시험이 미뤄졌지만, 합격은 자신 있다”며 “수어를 통해 한국과 일본, 농인과 청인을 잇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 외국인 수어통역사
“한국어가 한국의 문화를 담은 언어인 것처럼 수어도 농인들의 언어예요. 표정과 공간 등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농인의 문화를 담은 독립된 말이죠. 수어가 전 세계 공용이 아니고 일본 수어, 한국 수어가 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문화가 다르니까요.”
사오리는 수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농문화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게 ‘수어 이름’이다. “농인들은 손가락과 얼굴을 활용한 수어 이름을 갖고 있어요. 대부분 수어 이름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본명을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우스갯소리로 농인 범죄자가 경찰에 잡히면 본명을 몰라서 공범을 못 잡는다는 얘기도 있죠(웃음).”
수어에 빠진 건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홍보대사로 참여하면서다. 여기에서 성화 봉송에도 참여하고 선수단과 동행하며 인터뷰도 하고 기사를 써 올림픽 소식을 일본에 전하는 역할을 했는데,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장애인 선수들에게 반하게 됐다. 그는 “한국에 살면서 비장애인들과만 소통하면 훌륭한 많은 사람과 연결될 기회를 놓치는 거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래서 장애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관문인 수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포부는 거창했지만 외국인이 한국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국 수어를 배우는 건 쉽지 않았다. 대학생 때 6개월 어학연수를 한 게 전부라 한국어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유튜브로 기초를 다지다가 그해 10월부터 서울시 수어 전문 교육원에 다녔다. 방송보다 수어 공부를 우선했다.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공부했어요. 시험 3개월 전부턴 외부 활동도 최소화하고 독서실에 틀어박혔죠. 통역 기법, 농문화와 역사, 장애인 복지, 국어 등 모든 과목이 너무 어려웠어요. 9급 공무원 시험 수준의 국어 과목을 준비하려고 노량진 공무원 학원 강의까지 들었어요(웃음).”
국가 간, 장애-비장애인 간 벽 허물고 싶어
한국어와 수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3년 차. 이제는 한국어도 막힘이 없고, 농인들과도 수어로 능숙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됐다. 요즘은 유튜브 개인 채널 ‘OFFICIAL SAORI’에 K팝 수어 커버 영상을 올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지난 8월에는 방탄소년단의 ‘ON’ 커버를, 지난달 28일엔 ‘다이너마이트’ 커버를 올렸다. 노래 가사가 수어로 잘 전달되도록 직역이 아니라 의역을 하고, 약간의 춤과 퍼포먼스까지 곁들이다 보니 영상 하나를 만들 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는 “수어를 알리는 데 문화 콘텐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청각장애인 중에는 구어를 학습하거나 입술을 읽는 사람도 있어서 비장애인 가족조차 수어를 전혀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만큼 인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여러 드라마에도 소개되면서 점점 알려지는 걸 보면서 콘텐츠의 힘을 빌려 수어를 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인 커뮤니티의 반응도 좋다. “제가 농인들 사이에선 이미 ‘수어 하는 일본인’으로 이미 좀 알려졌어요(웃음). 한국 청인은 물론 청각장애인 가족조차 수어를 안 배우는 경우가 많은데 대단하다고요. 든든한 지원군이죠. 앞으로 일본과 한국 사이, 청인과 농인 사이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