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호주제 폐지됐지만… ‘부성우선 원칙 거부’이유로는 성인 성본변경 안 된다?

30대 A씨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어머니 성을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상담한 기관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A씨가 성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것이 ‘부성주의 반대’라는 신념 상 이유였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성을 바꾸는 ‘성본변경’은 법원의 허가를 받게 돼 있는데, 부모의 이혼 등 ‘일상생활의 현저한 어려움’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A씨는 “호주제가 폐지됐고, 분명히 판례엔 ‘정체성 문제’를 고려한다고 쓰여 있는데 왜 신념 상의 이유로는 어렵다고 하는지 답답하다”면서 “최근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머니도 동참하게 돼 어머니의 성본 변경도 함께 신청 중인데, 둘이 함께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했다.

호주제는 없지만, 엄마 성(姓) 따르려면 ‘불편 입증해라?’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자녀가 당연히 아버지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부성우선주의’ 원칙에도 틈이 생겼다. 트위터 등 SNS에서도 ‘부성주의 반대 이유로 어머니 성으로 바꾸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가부장제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법이 여전히 공고하기 때문이다. 민법 제781조 제6항에는 ‘자녀의 복리’를 위해서 성과 본을 바꿀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복리를 아버지의 성을 따르면 심각한 생활상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보여야 인정해준다. 서울가정법원관계자는 “성본변경을 한 경우와 하지 않은 경우를 비교해 변경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까지 주관적인 선호로 성을 바꾼 적은 없다”고도 했다. 사실상 부성주의 거부를 이유로 성을 바꾸려는 사람은 있지만, 허가된 적은 없다는 뜻이다.

성본변경 절차 자체가 여전히 가부장제의 틀 안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성본변경은 신청자가 소재지 가정법원에 신청하면 판사가 심리한 후 허가를 내주는 방식이다. 이때 범죄로 인한 신분세탁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자신의 범죄경력과 수사경력 증명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친아버지 동의서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법원 관계자는 “필수는 아니지만, 아버지 동의가 있으면 허가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로 인해 오랜 기간 고통을 받고 연락을 끊었던 사람이 성본변경을 위해 아버지와 다시 연결된 사례도 있다. 해당 사례자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완벽히 끊기 위해 성본변경을 신청했는데, 아버지 동의를 받아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수소문해 연락하게 됐다”며 “이후 내 연락처를 알게 된 아버지가 다시 연락을 해와 너무나 괴로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이유로 부성우선주의를 거부한다는 신념을 가진 성인들도 성본변경을 신청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런 행정상 어려움 때문에 일상생활에선 어머니와 아버지 성을 이어 쓰고, 행정상 이름은 그대로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개인을 나타내는 이름과 달리 성은 어떤 가족에게 속해있는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서 “마음대로 성을 변경하면 가족 간 유대 관계 단절 등이 생겨 신청인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변경 기준이 엄격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서울가정법률 상담소 관계자는 “법원 태도가 보수적인 것은 부성우선주의 원칙대로 쓰여진 민법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라며 “법 개정이 먼저 돼야 변한 사회분위기에 발맞춘 판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가정법원 전경. /연합뉴스

거세지는 부성우선주의 원칙 거부 흐름…법 바뀔까

그러나 부성우선주의 폐지를 위한 움직임은 거세지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2018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진행한 ‘자녀의 성 결정제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연구’에 따르면 ‘부성주의 원칙은 불합리하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67.6%에 달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6월 30일 발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서도 ’자녀의 출생신고 시에 부모가 협의하여 성과 본을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 ‘하는 것에 대해 응답자의 73.1%가 ‘찬성한다’고 했다.

혼인신고 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르도록 하겠다고 신청한 부부도 늘고 있다. 지난 8월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이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혼인신고 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한 부부는 379쌍이었다. 당시 이 의원은 “몇 년 사이 부성우선주의에 반대하는 부부가 늘면서 법 개정의 필요성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했다.

2008년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하위법에서 여전히 부성우선주의를 도입하고 있어 성본변경이나 자녀에게 모성을 주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부성주의 폐지 움직임은 당분간 거세질 전망이다. 정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도 부성우선주의 폐지에 관한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달 14일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부성우선주의를 없애자는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자녀는 부의 성을 따른다는 원칙을 없앴고, 출생신고 시 부모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며 성본변경 시에도 ‘필요가 있을 때’라는 요건을 삭제한다”는 내용을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결혼이나 성과 관련된 하위법들이 바뀌어야 진정한 성 평등이 이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법률구조2부장은 “성 평등이 중요한 사회 의제로 떠올랐고, 호주제 폐지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법안 개정은 당연한 수순”이라며 “민법에서 부성우선주의를 당연시한 법들이 바뀌면 이를 이유로 한 성본변경도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김지강 청년기자(청세담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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