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시장이 갈수록 얼어붙는다. 통계청의 ‘2019년 사회조사’를 보면 지난 1년간 한 번도 기부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전체의 74.4%나 됐다. 2011년 첫 조사 때보다 10.8%P 늘었다. 기부하지 않은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투명성’을 꼽은 사람이 많았다. ‘기부단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14.9%나 됐다.
전문가들은 ‘블록체인’이 기부 투명성을 강화할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신뢰 결핍’을 해결할 기술로 블록체인을 지목했다. ▲거래내역이 자동으로 기록되고 ▲누구나 살펴볼 수 있으며 ▲수정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서 기부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분석이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기부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지만, 주변에 경험자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효과적이다. 그리고 믿을 수 있다. 다만 진입 장벽이 높다. 기부를 완료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기부까지 한나절, 포기할 뻔했다
블록체인 기부 플랫폼이 ‘암호화폐’로 굴러가는 생태계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암호화폐를 기부받아서 다시 수혜자에게 나눠 주거나, 현금·현물로 바꿔 전달하는 구조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범용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SVC”BHFT’ 등 현금과 가치가 연동되는 기부 전용 암호화폐를 쓰는 곳도 있다. 기부가 이뤄진 순간부터 수혜자나 배분 기관이 이를 현금·현물로 교환할 때까지 암호화폐의 여정을 추적한다는 기본 개념은 같다.
기자는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가 2018년 설립한 바이낸스자선재단을 통해 우간다 여성들에게 생리대를 지원하는 ‘핑크 케어 토큰(Pink Care Token)’ 프로젝트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준비할 것은 ‘암호화폐 지갑(Crypto currency wallet)’이었다. 은행 거래를 할 때 계좌번호가 필요한 것처럼 암호화폐도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 34자리의 고유 주소를 부여받아야 거래를 시작할 수 있다. 암호화폐 지갑은 암호화폐 거래소에 가입하면 얻을 수 있는데, 국내 주요 거래소 가운데 한 곳을 선택했다.
암호화폐는 보안이 생명이라고 했던가. 회원 가입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이메일·휴대전화·신분증·계좌번호 등을 차례로 인증하고, 추가로 보안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일회용 비밀번호(OTP)’까지 설정했다. 끝이 아니다. 암호화폐를 다른 지갑으로 옮기려면 ‘2차 인증’을 거쳐야 한다. 2차 인증은 거래소 직원과의 영상통화로 진행된다. 신분증을 턱밑에 붙이고서 “내가 맞는다”고 말하고서야 비로소 마무리됐다.
암호화폐를 사들이는 일 자체는 주식 거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수 희망 가격을 설정하고 개수를 입력하면 끝이다. 리플 200개를 개당 325원을 주고 샀다. 암호화폐를 샀으니 이제는 기부에 나설 차례. 핑크 케어 토큰 페이지에 접속해 ‘기부하기’ 버튼을 눌렀더니 화면에 암호화폐를 보낼 지갑 주소가 나타났다. 다시 거래소로 돌아가 주소를 입력하고 암호화폐 종류와 개수를 써 넣었다. 5분쯤 지났을까. 기부 페이지에 ‘2020년 2월 5일 오후 5시 41분 20초에 BETTER FUTURE(더나은미래)라는 기부자가 리플 100개를 기부했다’는 기록이 생성됐다. 고작 리플 100개를 기부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기부를 하고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기부자 의사 따라 기부금 사용처 결정
암호화폐 기부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일이지만, 세계적으로는 기부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블록체인 전문 매체 더블록의 지난달 11일 보도를 보면 미국 100대 자선단체 가운데 12곳이 암호화폐를 기부받는다. 유나이티드웨이월드와이드·미국적십자사·피델리티자선기금 등 주요 단체가 앞장섰다. 피델리티자선기금은 특히 적극적이어서 2015년부터 4년간 암호화폐로만 1억600만달러(약 1300억원)를 모금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유니세프가 유엔 산하 기구 가운데 처음으로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암호화폐를 기부받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암호화폐 기부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지갑을 만드는 일부터 복잡한 인증을 거치기까지 초기에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이 문턱만 넘어서면 장점이 많다. 기부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다. 누가, 언제, 어떤 암호화폐를 얼마나 주고받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모든 기록에 ‘Txid’라는 증명서가 발급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Txid는 택배로 따지면 ‘운송장 번호’ 같은 개념이다. 암호화폐는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새로운 Txid가 생성되는데, 이 기록을 따라가면 처음 거래가 이뤄진 시점부터 마지막 거래까지 차례대로 살펴볼 수 있다. 운송장 번호만 알면 택배 위치를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기부자의 의사에 따라 명확하게 기부금 사용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블록체인 기부의 강점이다. 한국모금가협회가 지난해 발표한 ‘기부문화 인식 실태조사를 통한 기부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를 보면 응답자의 96.1%가 ‘기부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블록체인 플랫폼을 활용하면 기부금이 뜻대로 쓰였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핑크 케어 토큰 프로젝트의 경우 오직 우간다 여성이 생리대를 살 때만 기부금이 쓰이도록 설계됐다. 기부된 암호화폐는 ‘PCAT’라는 기부 전용 암호화폐로 교환돼 수혜자에게 전달된다. 수혜자는 PCAT를 취급하는 상인에게 암호화폐를 건네고 생리대를 받는다. 바이낸스자선재단은 상인이 모은 PCAT를 우간다 화폐로 등가교환해주는 것으로 이 생태계를 유지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1만1600명이 혜택을 받았다. 바이낸스자선재단에 따르면 한화로 약 1만원의 가치가 있는 PCAT 1개로 여성 1명이 1년간 쓸 생리대를 살 수 있다.
기자가 기부한 암호화폐는 아직 배분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PCAT로 바뀌어 수혜자의 암호화폐 지갑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간다 여성 3명이 적어도 1년간은 생리대 때문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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