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취재차 방문했다는 전화가 채 끊기기도 전에 태권도복을 입은 소년이 환한 인사를 건네왔다. 소년이 안내한 곳은 하얀색 벽지만큼이나 단출한 살림살이의 반지하 집. 큰 눈망울로 선물을 뜯어본 아이는 이내 태권도 갈 시간이라며 집을 나섰다. 아이의 이름은 오마르(10∙가명), 2년전 예멘을 떠나온 파티마(37∙가명)씨의 둘째 아들이다. 식탁에 마주 앉자마자 엄마의 아들 자랑이 이어졌다. “오마르가 한국어 받아쓰기 시험을 힘들어하더니, 얼마 전 100점을 맞았어요. 대견하죠.(웃음)”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난민 인정은 하늘의 별따기”
파티마네 가족은 예멘을 떠난 수십만의 가족 중 하나다. 2015년 수니파 정부군과 시아파 알 후티 반군 대립으로 시작된 예멘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으로 확정됐다. 계속되는 전쟁에 기아와 콜레라 등의 전염병까지 겹치며, 국민 2700만명 중 32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여전히 1900만 명 이상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유엔에서 예멘 내전 사태를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라고 했을 정도. 예멘의 항구도시 아덴 출신인 두 부부 역시 이 사태를 피해 한국까지 오게 됐다.
“수도 사나에 이어 아덴까지 반군에 점령당하면서, 남편도 반군에 참여하라는 압박을 받았어요. 그럴 순 없다고 거절한 뒤에 박해를 피해 요르단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도 비자를 요구했어요. 1년 후 한국행을 택하게 됐죠.”
생명의 위협을 피해 나고 자란 땅을 떠나 한국까지 왔지만, 이곳에 정착하는 것 역시 ‘하늘의 별따기’ 였다. 예멘 출신 난민들은 반군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없어 난민인정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 필요한 요건을 갖춘다고 해도 난민으로 인정받는 이들은 극소수다. 예멘 출신 난민 신청자 260명 중 5명만을 난민으로 인정했던 것. 지난 2016년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예멘 난민 인정’ 캠페인도 벌어졌다.
◇인도적 체류자, 사회복지의 사각지대
사실 가족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뇌병변을 앓는 첫째 아들 유세프(13)와 함께 치료를 받으러 다녀갔기 때문.
“유세프가 태어나고 10분 동안 뇌에 산소 공급이 안됐어요. 그때 이후로 뇌병변을 앓게 됐죠. 혹 치료를 받으면 아이가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집트나 요르단에 있는 유명한 병원들을 찾아 다녔어요. 그러다 한국에 가서 치료받아보라는 권유를 받았죠.”
2014년, 가족은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유세프가 열살때의 일이다. 그러나 시기를 한발 놓친 뒤였다. 엑스레이 사진을 본 주치의는 ‘아이가 일곱살만 됐어요 2년간의 치료를 통해 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헤모글로빈 합성 이상으로 정기적 수혈을 필요로 하는 ‘지중해빈혈’도 진단받았다. 의사는 추후 재방문을 권했고, 이때의 진료기록을 바탕으로 지난해 7월 의료관광비자를 발급받아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지난 8월 파티나씨 가족은 다행히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다. 인도적 체류(G-1-6)는 난민인정 조건에 해당하지 않지만, 재난이나 정치적 이유로 인해 본국에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자격이다. 난민으로 인정되는 것과는 달리 1년 뒤 갱신해야 한다.
문제는 ‘인도적 체류자’에겐 의료보험이나 최저 생계비 지원 등 사회보장 혜택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 취업은 단순 노무직으로 제한된다. 결국 인도적 체류 제도는 본국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강제송환을 막아주는 임시 방편일 뿐, 생존은 개인의 몫이다.
“인도적 체류자에겐 건강보험이 없다보니, 치료비 부담이 제일 크죠. 유세프는 일주일에 한번씩 나사렛 국제병원에서 굽은 체형과 팔다리를 교정하는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거든요. 한번에 12만원의 치료비가 드는데, 치료가 늦어질 수록 몸이 굳어요. 3개월마다 수혈도 받아야하는데, 헤모글로빈 수치에 따라 수혈량도 달라요. 가격도 19만원에서 30만원정도가 들고요. 부담이 크죠.”
이전엔 남편 무함마드 씨가 유리공장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감당했지만, 무릎에 물이 차는 활막염이 오면서 일을 쉬는 중이다. 통원치료를 하며 간간히 하는 아르바이트에, 온 가족의 생계가 달렸다. 무함마드씨가 일하던 유리공장은 4대보험을 지원하지만, 공장의 다른 외국인근로자들과는 달리 인도적 체류자는 지역건강보험 신청 자격에서 제외되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단순 충치치료에 200만원이 청구된 시리아 난민도 있었다.
◇도움의 손길 넘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파티마 씨 가정의 사정을 알고 돕는 단체들이 있다. 유세프의 교육을 담당하는 연일학교에선 매달 12만원의 의료카드를 지급한다. 대한적십자사에선 3개월치 집세를 후원했고, 나사렛국제병원을 통해 연결된 인천의 한 단체에선 3개월에 200만원씩 지원금을 보낸다.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에서도 지난 3개월간 매달 30만원씩 지원했다. 그러나 모두 유세프의 병원비로 쓰이기에도 빠듯하고, 지원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직접 일자리를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어요. 아이가 있는지부터 물어보기도 하고, 유세프를 데리고 가서 일할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고요, 난민인정자(F-2)처럼 자영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예멘 식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 수도 있고, 잼을 만들 수도 있고요. 남편이 아파도, NGO 단체의 지원이 끊겨도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요.”
파티마씨 가정의 인도적 체류 지위 획득 과정을 도운 피난처 변수현 간사는 “제도 개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난민에 대한 인식개선”이라고 했다.
“법 개정 관련해선 예전보다 훨씬 긍정적이에요. 난민인권옹호 NGO와 방향 차이는 있지만, 법무부 내에서도 난민법 개정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고, 난민 취업이나 인도적 체류자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해선 실제적인 논의가 진행중이거든요. 다만 제도만 바뀐다고 다가 아니라 시민들의 인식이 가장 중요해요. 캐나다와 일본은 모두 1990년대에 난민법을 개정했는데, 두 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각각 41%와 0.1%로 크게 차이나거든요. 국민의 인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죠.”
피난처에서 국내 난민인식 개선을 위해 ‘#우리와_같은_보통사람 : 저스트라이크유(Just like you)’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엔 여전히 난민에 대한 인식도 낮고 차별이 큰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난민으로 인정받기도 어렵고, 지원도 거의 없고요. 오마르가 자랐을 때엔 지금의 차별이나 어려움을 더이상 겪지 않아도 되면 좋겠습니다.”
*통역은 서희웅 피난처 자원활동가가 지원했으며, 요청에 의해 예멘 가족들의 이름은 가명처리 됐다.
김진수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8기)